1797.0100128 구호대
석쇠를 들어낸 화로는 아직도 정어리 굽는 냄새가 밴 채로 방 한 가운데 붙 박혀 있다. 방안 가득히 채우고 있는 구수한 훈기도 밥상을 내면서 열린 샛문을 따라 들어온 시원한 늦가을 바람이 방안을 한 바퀴 돌면서 슬어 내갔다.
하늘 높이 날아가는 소리, 외치는 함성이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가 그 소리는 닫는 샛문과 함께 이내 끊겼다. 다시 훈기를 찾은 방안에는 읍에서 온 고종누나와 나만 남아 화로를 다시 차고앉아서 말씨름을 한다. 고종누나는 어린 딸을 잠재우고 내 흉을 보기 시작한다. 무릎을 세우고 화로를 독차지하고 앉은 나를 보고
‘무릎 세워 앉은 오금이 귀 위로 올라가면 죽는다던데’ 그러면서 손금을 본다며 생명선이 끊겼느니 어쩌느니 하고 기를 죽인다. 그러고 보니 내 귀는 양 무릎을 한 뼘이나 내려가 있고 양손을 깍지 껴서 턱을 바치고 있다.
누나의 얼굴을 뚫어보다가 얼른 허리를 펴고 뒤로 물러앉아 한바탕 소리 지른다.
‘내가 왜 죽어!’
외치는 소리에 놀란 어머니가 샛문을 열고 들어오시고 행주치마로 손을 닦으시며
‘우리아들 누가 죽이니’
이 말씀과 범벅이 되어 먼데서 여럿이 외치는 고함소리가 또 섞여 들어왔다.
잠에서 깨어난 어린 딸을 다독이며 누나는 말한다. 나이를 먹으면 점점 허리가 굽어서 종국에는 양 귀가 양 무릎을 내려가게 된다는 얘기라며 깔깔댄다.
‘윤아 저 소리가 무슨 소린지 아니?’
‘...?...’
‘구호대야’
‘구호대가 먼데?’
나는 아직 구호대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열성적인 지역 청년들의 자체적으로 구호대를 조직하여서 저렇게 일직부터 뿌리내리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누나는 돌아갔다. 몇 달 후 우리학교에서도 구호대가 조직되었고 나 또한 저녁마다 길거리를 돌며 선동과 선전의 선봉에 섰다.
'문맹을 퇴치하자'
'남녀평등을 이룩하라'
'노동자 농민은 단결하라'
'소비에트 혁명 만세'
'위대한...'
구호의 종류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그리고 누나의 ‘구호’도 내 귀를 맴돌기 시작하며 내 생활과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심어 주곤 했다.
귀가 무릎 밑으로 내려가면, 손금의 명줄이 끊어졌으면, 이두가지 구호는 구호가 아니라 경구(警句)였다.
일깨우는 누나의 한마디는 바람을 타고 방안에 들어온 구호 소리와 함께, 그 구호 소리와 어울려서 내 귀속으로 깊숙하게 틀어박혔다.
이후 나는 허리 펴는 운동이라면 무엇이든 마다 않았고 가슴을 펴는 자세 또한 이날까지 잠자는 때를 빼고는 한시도 잊지 않고 돌아보고 다지고 다졌다.
이날까지 계속되는 누나의 그 말 한마디가 내 건강을 지키고 있으나 나를 이토록 건강하게 한 그 누나는 일직이 자기 귀를 무릎 밑으로 깊이깊이 집어넣고 자기 손금의 명줄을 잇지 못하고 영원히 잠들고 말았다.
누나여 복락을 누리소서!
구호대와 누나의 말 외마디. 입을 통하여 나오는 기운은 천기를 모아 내는 인간의 폭풍우다.
외치는 소리가 순풍을 탈 때 기틀은 다져지고 외치는 소리가 역풍을 탈 때 권력의 힘은 한계에 이른다는 나름의 이치도 이 나이에서야 비로써 터득했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