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짐승의 차이를 잘 모르던 시절의 어느 날, 문득 사람은 짐승과는 다르게 아기를 낳고 기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한동안 변하지 않고 사람의 탄생은 사람이 감히 엿볼 수 없는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사람은 짐승과 같이 자웅(雌雄)이 필요하질 않고 다만 상호 존경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써 태어나는 신비적 존재로, 짐승과 차별화했든 내가 이 시기에, 교과목에 있는 동물학 수업을 받으면서부터 사람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당시의 내 마음은 절망, 그것이었다. 사람은 적어도 짐승들과는 다르게 태어나야 마땅하다는, 그렇게 믿고 의지하고 싶었는데 동물학을 가르치는 선생은 무참히도 내 신조를 깨고 말았다.
차라리 원생동물처럼 세포의 분열로 자기의 대를 이어가는 것이 인간의 고귀함을 드러내는 것 같은 심경조차 들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적어도 동물과 달리 선택돼서 살아가는 존재여야 한다는, 소박하고 순수한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짐승을 다스리면서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도 얼굴을 붉히며 사람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나는 사람만은 신성시돼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듣는 친구들의 귀에는 가장 유치한 옹고집으로 통했던 그 논쟁이 처절한 나의 패배로 몰리는 생물 선생님의 생식 강의였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지만 논리 정연한 설명에는 내 고개가 숙였고 두 손을 들게 되었다.
이후 사람을 보는 나의 눈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모두 짐승같이 보였고 다시 보게 되는, 일대 변화를 겪으며 갈등하는 세월을 몇 년을 보냈다. 이런 나의 인간에 대한 존엄성 아집은 몇 해 뒤에 내가 이성에 눈뜨면서부터 그 생각이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하더니 인간과 동물의 차별을 다른 측면에서 찾으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 차별이 이른바 생산성을 갖는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존재를 사람이라 하고 이를 만들 수 없는 존재를 짐승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따져 보면 그럴듯하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인류만이 도구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거미는 온갖 날짐승을 포획하기 위해서 거미줄로 그 기가 막히는, 기하학적 망(網)치기에서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수준과 정교함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데 무엇으로 설명되고, 풀밭에서 개미를 잡아먹는 집게벌레 개미귀신이 모래 구덩이를 정교하게 파놓고 자기보다 몇십 배나 큰 개미가 일단 빠지면 기어오를 수 없도록 정교하게 각도를 이룬 원뿔 추를 거꾸로 모래 속에 묻어 놓은 것 같은, 그런 도구는 사람도 만들 수 없는 것,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은 사람이지 짐승과 동일시하는, 그때의 가르침은 나를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곳으로 몰고 갔다. 그러면서 세월이 가고 다윈의 진화론에도 심취하면서 사람의 배태 과정과 모태에서의 십 개월이 인류의 선조가 인류가 되기 전, 그러니까 이 지구상에 생물이 창조되는 그 순간부터 사람이 되기까지의 오랜 기간을 단 십 개월 동안에 완성한다는 설명에는 비록 사람의 조상이 유인원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배태의 과정을 설명하고 성장의 과정을 그림으로나마 알아볼 수 있었을 때, 또 다른 감회가 있었다. 그 무한한 능력의 경이로움이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람은 짐승과 다르게 창조되어 별도의 섭리 하에 놓여서 생의 보람을 누리고 있음을 믿고 싶다. 이 욕심은 누구나 다 갖는 공통의 인류 숙원이다.
사람은 짐승처럼 교접(交接)으로 탄생 돼선 안 된다는, 그때의 순수했던 생각은 내 평생 세파를 겪으면서 뒤집히고 젖혀지고 찢어지면서도 되살아나곤 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짐승과 사람의 차이인가 싶어서 또 손 모아 묵상해 본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