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4.010308 생식
사람과 짐승의 차이를 잘 모르던 시절의 어느 날, 문득 사람은 짐승과는 다르게 아기를 낳고 기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한동안 변하지 않고 사람의 탄생은 사람이 감히 엿볼 수 없는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사람은 짐승과 같이 자웅(雌雄)이 필요하지 않고 다만 상호 존경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써 탄생되는 신비적 존재로, 짐승과 차별화 했던 내가 이 시기에 교과목에 있는 동물학 수업을 받으면서부터 사람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당시의 내 마음은 절망, 그것이었다. 사람은 적어도 짐승들과는 다르게 태어나야 마땅하다는, 그렇게 믿고 의지하고 싶었는데 동물학을 가르치는 선생은 무참히도 내 신조를 깨고 말았다. 차라리 원생동물처럼 세포의 분열로 자기의 대를 이어가는 것이 인간의 고귀함을 드러내는 것이 나을 것같은 심경조차 들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적어도 동물과 달리 선택돼서 살아가는 존재여야 한다는, 소박하고 순수한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짐승을 다스리면서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도 얼굴을 붉히며 사람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나는 사람만은 신성시 돼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듣는 친구들의 귀에는 가장 유치한 옹고집으로 통했던 그 논쟁이 처절한 나의 패배로 몰리는 생물선생님의 생식 강의였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치지만 논리 정연한 설명에는 내 고개가 숙여졌고 두 손을 들게 되었다.
이후 사람을 보는 나의 눈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짐승같이 보였고 다시 보게 되는, 일대 변화를 겪으며 갈등하는 세월을 몇 년을 보냈다.
이런 나의 인간에 대한 존엄성의 아집은 몇 해 뒤에 내가 이성에 눈뜨면서부터 그 생각이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 하드니 인간과 동물의 차별을 다른 측면에서 찾으면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 차별이 이른바 생산성을 갖는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존재를 사람이라 하고 이를 만들 수 없는 존재를 짐승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따져 보면 그럴듯하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인류만이 도구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거미는 온갖 날짐승을 포획하기 위해서 거미줄로 그 기 막히는, 기하학적인 망(網)치기를 함에서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수준과 정교함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데 무엇으로 설명되고, 풀밭에서 개미를 잡아먹는 집게벌레는 모래구덩이를 정교하게 파놓고 자기보다 몇 십 배나 큰 개미가 일단 빠지면 기어오를 수 없도록 정교하게 각도를 이룬 원뿔 추를 거꾸로 모래 속에 묻어 놓은 것 같은, 그런 도구는 사람도 만들 수 없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람은 사람이지 짐승과 동일시하는, 그때의 가르침은 나를 무척이나 혼란스런 곳으로 몰고 갔다.
그러면서 세월이 가고 다윈의 진화론에도 심취하면서 사람의 배태과정과 모태에서의 십 개월이 인류의 선조가 인류가 되기 전, 그러니까 이 지구상에 생물이 창조되는 그 순간부터 사람이 되기까지의 오랜 기간을 단 십 개월 동안에 완성한다는 설명에는 비록 사람의 조상이 유인원이라고 믿지 않는다 하드래도 배태의 과정을 설명하고 성장의 과정을 그림으로나마 알아볼 수 있었을 때, 또 다른 감회가 있었다.
그 무한한 능력의 경이로움이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사람은 짐승과 다르게 창조되어 별도의 섭리 하에 놓여서 생의 보람을 누리고 있음을 믿고 싶다. 이 욕심은 누구나 다 갖는 공통의 인류숙원이다. 사람은 짐승과 같이 교접(交接)에 의해서 탄생 돼선 안 된다는 그때의 순수했던 생각은 내가 평생의 세파를 겪으면서 뒤집히고 젖혀지고 찢어지면서도 되살아나곤 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짐승과 사람의 차이인가 싶어서 또 손 모아 묵상해 본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