農丈人星曉暎空(농장인성효영공) 농부의 별은 새벽녘 공중에서 반짝이고
烟霜衝冒稻陂東(연상충모도피동) 안개 뚫고 서리 맞으며 동편 논으로 나간다.
酸醎已熟長貧日(산함이숙장빈일) 시고 짠 세상맛은 긴 가난 탓에 실컷 맛보았고
冷暖偏經久旅中(냉난편경구려중) 냉대와 환대는 오랜 객지 생활에서 뼈저리게 겪었지
親老那能辭鄙事(친로나능사비사) 부모님 늙으셨으니 천한 일을 마다하랴
才踈端合役微躬(재소단합역미궁) 재주가 모자라니 육체노동하기 딱 어울린다.
談非景略何捫虱(담비경략하문슬) 경략(景略)*의 달변이 없으니 이(虱)를 문질러 잡으랴
姑把溫顔對社翁(고파온안대사옹) 온화한 낯빛으로 촌 노인네 마주해야지.
/이덕무(李德懋·1741~1793)
*‘경략’은 중국 동진(東晉)의 정치가 왕맹(王猛)의 자(字). 그는 남과 대화하면서 이를 문질러 죽이는 등 방약무인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가 20대 후반의 어느 해, 가을걷이하는 논두렁 위에서 시를 썼다. 충청도 천안에 소유한 논에서 그는 해마다 벼 열 섬씩 수확하여 생활을 꾸렸다. 그리 힘들 것도 없으련만 새벽같이 일 나가며 이런저런 감회가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난다. 가난뱅이라서 시고 짠 세상맛도 실컷 맛보았고, 객지에서 남들의 냉대도 뼈저리게 겪었다. 불쑥 인생의 고달픔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그래도 이렇게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닌가? 불평 없이 몸을 움직여 일을 해야지. 아무래도 서울 샌님의 몸으로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을 하고, 낯이 선 농부들과 어울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먼동 트는 논두렁길을 걸어가는 초보 농사꾼 선비의 서툰 몸놀림이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