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

외통넋두리 2008. 9. 2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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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

5495.021229 고비

 

멀리,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 마는 듯, 내 원초의 순간으로 되돌리는 음의 영역으로 아득히 멀어지는 소리, 가물가물 무아의 저쪽으로 숨어버려, 그냥 하얗다.

 

옆구리에 물것의 자극을 느꼈다. 그것은 누운 채로 나를 꼬집는 아내의 손길이었으나 한 순간 그렇게 느꼈을 뿐, 까닭의 꼬리를 붙잡지 못해 놓치고, 다시 아무것도 아닌 채 솜털같이 떠서 날아갔다.

 

얼마를 지났는지 모른다. 목덜미가 시원해지더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꺼지는 어깨에 무게가 실리더니 눈앞이 부옇게 무언가 얼른거린다.

 

내 존재조차 자각하지 못하니 도무지 무슨 일인지를 알 길이 있을 리 없었고, 그 채로 양 죽지를 잡혀 툇마루에 끌려 나왔을 것이다.

 

발 뻗쳐 벽에 기대어 뉜 나를 내가 알아 차렸을 때, 비로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는데도 물어 볼 힘도, 수습의 가닥도, 손짓할 엄두도 나지 않아 그저 멍하게 바라만 보고, 보는 것이 아니라 눈만 뜨고 있었다.

 

몽롱해 지면서 어딘가에 실려 가는 기분, 호사스러운 요동(搖動)에 다시 하얗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희가…’

 

바람소리 들이키며 어렴풋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 이 소리가 섞여 들렸다. 차는 미아리 고개를 차고 오르고 있었다.

 

나는 차안을 훑었다. 아내와 아들과 내가 뒷자리에, 그리고 처형 한 분이 앞좌석에 앉았고 ‘희’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어딜 갑니까?’ 물었을 때 미칠 듯이 소리 지른 사람은 처형이었다.

 

‘아저씨! 정신 차려요!!’

 

처형은 몸짓으로 소리를 키워가며 차안에 가득 채워서 날 각성시켰다.

 

“‘희’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영’이는 이렇게 아무리 흔들어도 깨질 않아요!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어젯저녁에 무얼 잡수셨는지 말씀해보세요!!”

 

시계같이 움직이는 내가 제 시간에 출근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무슨 일이 생긴 거라고 짐작한 회사직원은 그 사연을 알 길이 없었음으로 전화를 매달고 있는 처형 집에 연락했던가보다.

 

모름지기 이 연락도 안 되었더라면 아직 우리 네 식구는 잠인 듯 죽음인 듯 누워 있었을 것이다.

 

‘???’ 도무지 무슨 영문이지 모를 일이다.

 

나는 도리어 아내에게 왜 내가 출근을 못하고 이 차를 탔는지 물었지만 말로써 전달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옆에 아내의 무릎을 베고 늘어진 채 거품을 괴는 아들 ‘영’을 보았다. 자는 듯이 누어있다.

 

‘여보 어떻게 된 거예요?’ 옆자리의 아내에게 또 물었지만 아내는 아무대답이 없다.

 

제대로 들릴 리 없는 내 소리, 제대로 들을 수 없는 아내의 귀였을 것이다. 팔을 뻗어 내 옆구리를 또 꼬집을 뿐이다.

 

계속해서 나를 의지하려 최고(催告)의 몸짓을 하는데도 내 의식은 가물거리고, 아내는 나와 의사를 나누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서로는 말맥을 잇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비로써 아내의 무력한 심신을 눈치 챘고 무언가 이상한 느낌, 두려운 생각,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정신은 점점 깨어났다.

 

‘서울대학병원으로 갑시다! 거기에는 유일하게 산소 통이 있답디다.’

 

내 말에 처형은 쉼 없이 이어 말했다.

 

‘안 그래도 그리 가고 있습니다.’

 

우리식구 모두는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있었다. 부축을 받아가며 어딘가에 들어갔다. 아내는 실려 왔고 아들도 누군가에 의해서 안겨 왔으나 딸‘희’는 어디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이 우리로 인하여 갑자기 더 부산해졌다. 병원은 우리 식구의 전용터전이 된 듯 했다.

 

식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내겐 별다른 치료가 필요치 않는지, 창가에 앉혀서 바깥공기를 쐬며 쉬게 했다.

 

‘희는…’

 

처 형제간들이 대여섯 모여서 나누는 말소리에 섞인 이 한 마디를 듣고는 심장이 조여 멈추고, 무색의 세계 저쪽으로 떠내려갔다.

 

창가에 기대어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을 때 나는  침대에 뉘여 있었다. 다시는 처형들이 내 곁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아내는?, 아들은?, 딸은? 의문을 가지다가도 이내 무력해지면서 무감각해졌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이러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의식이 돌아 왔을 때 창밖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 날 저녁 아내와 함께 의사로부터 엄숙한 선언을 들었다. ‘따님은 저희 병원에 들어왔을 때 이미 손쓸 수 없었고, 아드님은 아직 산소통속에 들어가 있고, 아시다시피 두 분은 가벼운 가료(加療)만 필요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대처 하십시오’

 

재앙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온 식구 중 딸은 가고 아들은 사생의 기로에서 헤매고, 몽롱하게나마 기력을 찾은 우리 내외는 이 모든 사실을 두 눈을 뜨고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태산같이 밀려오는 슬픔을 엷은 매미 날개의 이성으로 막아야하고, 주검과 함께 하는 여로(旅路)에서 잡다한 말을 토해야하는 형극(荊棘)의 길을 가야했다.

 

아마 백치(白痴)의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우리생각으로 남을 설득하고, 믿게 하고, 반응케 하기는 정상(正常)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그리하여 금수의 세계에서 살다 막 돌아온 인간처럼 뭇사람들의 동정을 받고, 일방적 처리에 순종하는지도 모른다.

 

날이 샜다. 아직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통 안에 들어간 아들은 언제 나올지 어떻게 되어 나올지 아무도 말해 주는 이가 없다. 그러는 중에 불현듯 ‘희’가 보고 싶어서 의사에게 청했다. 내 딴에는 맑은 정신 같은데 의사들은 고개를 저으면서 다른 가족을 원한다.

 

다른 가족이란 있을 수 없었거니와 나는 내 눈으로 ‘희’의 숨결을 확인하고 싶었기에, 그래서 굽히지 않았다.  결국은 의사의 허락을 받아냈고, 떨리는 가슴을 움키고 비척거리는 몸을 가누어 ‘희’를 만나 볼 수 있었다.

 

눈만 내놓고 온몸을 흰색으로 둘러 쓴 직원이 차갑게 얼어붙은 네모자비 철궤의 손잡이를 잡아 당기니, 도르래 소리와 함께 흰 보쌈의 형체가 서랍 속에 담겨 나왔다.

 

보자기를 제치는 흰 장갑의 손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무감각의 사자(使者)였다.

 

넘어 선 영혼의 자취로 허울이 된 육신들만 차곡차곡 들어 있는 이곳에서 살아남은 나도 죽은 듯이 이들과 속삭이고, 오히려 뒤집힌 세상에서 내가 홀로 외로워짐을 느꼈다.

 

나는 이제 영혼만의 세계에서 나와 내 딸을 더듬는 것이다.

 

‘희’의 얼굴은 평온했다.  엄마 아빠를 원망 없이 보내는지, 속눈썹을 길게 깔아 고즈넉하게 쉬고 있었다.  그런 ‘희’의 얼굴이 나를 그대로 시간과 공간에서 빼내어 희미한 안개의 경지로 이끌었다. 그것은 죽음보다 무서운 허탈의 일순이었다. 이내 의식의 가장자리에 돌아왔을 때 ‘희’는 미치도록 슬프게 나를 끌어 들였다. 눈물도 몸부림도 아무 소용없는 차디찬 피의 응고가 그 안에 멈추어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뜰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서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희’와 함께 통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사는 의미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담당관은 내 죽지를 잡아 올렸다. 딴에는 냉정하다고 자부하는 나였지만 한참만에야 일어서서 나올 수 있었다.

 

‘희’는 갔다. ‘영’은?

 

슬픔과 공포의 한계를 넘으면 용기가 솟는 것인가?  다음의 절차를 냉정히 생각한다. 아무에게나 ‘희’의 장례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 아비의 도리를 다하는 마지막 순간을 그리면서, 이승의 마지막 인연을 끊는 요식인 진단서를 끊으려는데 ‘희’는 이미 이승을 떠난 뒤에 입원했기에 병원에서는 이승과의 인연을 끊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범법자의 신분으로 전락돼야했다. 경찰에서 피의자의 신분으로 조사를 받은 다음 이승의 연을 끊는 사망 진단서를 발급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생사의 갈림 길목에서도 피의자의 신분으로 전락되는 내 처절한 삶을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할 겨를도 없이 택시로 한참을 가야하는 먼 거리에 있는 경찰서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영락없는 죄인이다. 허긴 자식을 죽인 중죄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억울함은 온전히 내 감정일 뿐 명백한 것은 ‘희’가 영문을 모르게 죽었다는 사실, 이 하나만이 또렷이 드러나 있을 뿐이지 않는가?

 

이때에도 나는 나를 저버렸다. 항변의 열기도 순종의 좌절도 함께 ‘희’의 잔잔한 얼굴에 묻어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형사의 의도하는바 대로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심문에 응했다.

 

각가지 방법의 조사와 현장답사를 하는데 협조했다. 이런 심리적 고문은 내가 처한 경황에서 견디기 어려운 형벌이었다. 과정의 모든 것은 아빠에 대한 ‘희’의 원망으로 다가와, 기꺼이 얼마든지 내가 당함으로써 떠나가는 ‘희’의 꽃길을 열어주고 싶은 마음 가득할 뿐이다. 엄마아빠를 잘못 만나서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는 꽃, ‘희’의 고운 얼굴이나마 그대로 간직하여 보내지 못하는 어설픈 아빠, 내 움직이는 그때마다 ‘수희’의 관절 마디마디가 다시 부러지고 잘리는 것 같았다.

 

수사는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 나는 두 번째 ‘희’를 대면했다. 형사는 타살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희’는 발가벗기어져서 응혈의 흔적을 검증 받았다. 아빠의 혐의는 벗었다 하드라도 아빠 품에 안길 수 없도록 한 그 죄 값을 무엇으로 치를지, 나는  아마 죽도록 네 옆을 떠 날 수 없고 너 또한 나를 지우고 떠날 수 없으리라는 믿음을 굳히며 영면의 초행길, 작은 쇠 서랍을 천천히 닫고 ‘희’가 깔은 지남철에 붙은 발을 힘겹게 떼었다.

 

아내는 식음을 전폐하고 응급실을 지키고 있었다. 아내에게 ‘희’의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고통의 확대일 뿐 아무 소용없는 짓, 어느새 쉬쉬하게 되고, 오늘도 아내 몰래 동서와 함께 ‘희’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차에 올라탔다.

 

모든 것은 나의 불가항력 권역에서 수순대로 돌아가고, 나는 그저 객의 입장에서 추종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가야하는 저승길, 배웅의 쓰라림을 이미 경험했을 이 길, 그렇건만 결코 이들의 행사는 ‘희’의 마지막 길에 버금갈 수 없었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만은 그렇다. 다른 모든 이는 지극히 미미한 존재고, 오로지 나와의 마지막 이별의 장소로 가는 이 길은 꽃으로 가득 채운 유일무이한 ‘희’만의 길로 여기는 아비의 애끓는 마음, 하늘만은 알고 있으리라!

 

죽음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인가? ‘희’는 연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참이다. 그 길에 내 모든 것을 던져주고 싶다. 그러나 아비는 목숨을 던져 불길로 들지 못하고 고작 너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눈물에 얼룩진 돈만 노자의 이름으로 내놓고 만다. 있는 대로. 아무리 많은 돈을 노자로 내 놓는다 하드래도 ‘희’, 너 가는 길에 무슨 보탬이 될까마는 아비의 얄팍한 마음의 위로가 되겠기에 여기 이렇게 너의 갈 길을 돕는 아저씨들에게 맡기고 너를 보내마!

 

부디 잘 가거라!! 그리고 이다음 이 아비가 저승에 갔을 때 내 손을 잡아다오! 그리고 그때에 아비와 함께 이승에서 못한 네 한을 풀어보자꾸나!! 잘 가거라!!

 

‘희’는 하얀 재만 이승에 남겼다. 아니다. 이미 떠나간 혼의 유체(遺體)를 아비로 하여금 다시 분해하는 잔학(殘虐)의 공정(工程)을 맡겼다.

 

과정을 마친 그곳에서 머지않은 이곳으로 데려다준 택시 기사는 가버렸다. 건너다보이는 굴뚝에선 아직 하얀 연기가 하늘로 곧추 올라가고 있다. 멀리 굴뚝이 바라다 보이는 바로 이곳, 여기가 ‘희’의 발돋움자리로써 훗날 내가 찾을 수 있을만한 자리 같았다.

 

산 구비를 돌아가기 전이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 앞이 가려지는 숲 속을 기다시피 오르고 있었다.

 

딱히 어디에다 정해놓은 곳은 없었다. 동서는 한곳에 묻지 말고 고루 그대로 흩어버리자는 얘기를 이곳으로 오는 찻길에서 수 없이 되뇌며 나를 설득했었다.

 

그렇다. 훗날 내가 와 볼 수 있는 산이면 족하다. 이 산이야 설마 없어지겠는가 싶었다. 딱히 한곳을 정한다면 늘 찾게 되고 ‘유명을 달리한 사람을 자주 찾는 것은 산 사람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는 심한 말까지를 들먹이면서 동서는 흩기 시작했다.

 

내 몸에 있는 유기물은 모조리 눈물이 된 듯, 눈물샘이 터진 것처럼 흐르고 있었다. 하얀 ‘희’는 내 눈물을 안고 촉촉이 젖어가고 있었다. 아비의 잘못으로 가야하는 네가 아비의 죄과를 씻어줄 수 있다면, 너로 하여 풀과 나무를 키워다오! 그리하여 훗날 내가 너를 찾아오거든 네 대신 풀과 나무가 이승의 너를 대신해서 나를 반기게 해다오!

 

서울하늘이 보이는 비탈을 타며 온 산을 헤매 돌아 골고루 뿌렸다. 마지막 먼지까지 깨끗이 털어 뿌렸다.

 

팔에 안겨 세상의 온갖 것을 재롱으로 담아내어 내 가슴에 안겨주던 ‘희’. 부(富)의 상징처럼 우뚝 선 그 많은 집들을 선망하는 아빠의 허전함을 네 깜박이는 눈으로 채워주던 ‘희.’ 이제 ‘희’는 이 세상에서 볼 수가 없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동서는 나를 부추겨 세웠다. 어렴풋이 의식을 찾았을 때는 동서와 함께 어느 대중탕 안에 있었다. 기운이 다 빠진 나를 부축해 온 곳이 이곳이다.

 

나는 비몽사몽으로 외쳤다. ‘희야!’ ‘영’아!’ 동서는 당황했으리라. 온전한 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왔는지 나는 병원에 와 있었다. 긴 복도의 한 곳에 반디부리 같이 켜졌다 꺼지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점멸(點滅)꽃등이 수없이 많은 ‘희’의 보석 같은 눈물방울로 되어 흐르고 있었다.

 

‘영’이는 중증환자실에 와있다. 삶의 기운을 불어넣는 투명마스크로 뒤덮이고 입에는 버드나무 재갈이 물리고 손발은 뒤틀리고 있었다.

 

“‘희’의 뒤를 따라가지 마라라! 이 아빠의 세상살이를 어떻게 하려 너마져 사경에서 돌아오지 않느냐! 두 손 모아 비나니 ‘영’아 제발 의식이라도 회복 하려무나! <영>아! 아빠의 죄를 그만 탓 하려무나!”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내 옷자락을 흥건히 적시고, 식음을 전폐한 아내의 야윈 얼굴엔 눈물자국 만이 얼룩져, 둘은 복도의 의자에 그냥 말없이, 석고상처럼 붙어있다.

 

눈을 뜨면 복도 저쪽의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이 생명의 탄생과 소멸, 그 사이를 시간으로 축약하여 명멸하고, 외면하여 눈을 감으면 하늘에 솟는 연기가 굴뚝에 발 돋우고 나를 내려 본다.

 

다시 눈을 떠서 창밖의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들것에 실려 오는 시신 위에 씌운 흰 보가 유난히 눈부시다.

 

들것이 움직일 때마다 오그라진 팔다리의 흔들림에 흰 포장이 춤추는, 어느 호텔의 대형화재로 인한 그을린 사람들의 유체(遺體)들, ‘희’, ‘영’, 아내, 나, 실려 들어오는 시신들, 그리고 하얀 가운을 입고 분주히 오가는 의사와 간호사들, 모두는 십자로의 한 복판에서 각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분수령.

교차로. 남는 자와 떠나는 자의 영역.

정거장의 홈.

 

극한적 생각의 구석구석을 드나들면서 나를 죽이고 살리고 자학하고 고뇌하고 치료받으며 그대로, 고스란히 뼛속에 스며든다.

 

세상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피안의 저쪽에서 질펀히 열락(悅樂)의 잔치를 끝없이 벌이더라도 온갖 회한(悔恨)과 굴욕의 매듭을 꿰어 이어가는 나로서는 그 곳이 내가 갈 이승의 곳은 아닌 것이다.  단지 언젠가 찾아갈 ‘희’의 풀숲을 향해서, 사경(死境)을 넘나드는 ‘영’의 혼을 잡기 위해서 내 혼신을 다할 뿐이다.

 

또 하루가 지났다. 벌써 일주일씩이나 지났는지 달력은 새것으로 바뀌었다.

 

우리 내외는 간호사의 안내로 홀로 죽음과 싸우는 아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영’이는 우리를 보자마자 ‘엄마!!’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눈물이 방울방울 코 등을 넘어 매트 위를 적셨다.

 

우리 내외는 아들의 두 손을 한쪽씩 잡고 한없는 기쁨에, 드리운 슬픔에, 양극을 오가면서 삶의 진수를 담은 피눈물을 삼켰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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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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