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8.031224 잔해
언덕진 숲길에서 밟히던 황갈색 참나무 잎이 가루가 되기 위해서 비바람을 기다릴 때, 나는 동료직원과 함께 의미 있는 이 길을 걷고 있다.
고개를 젖혀보니 참나무 가지 끝은 구름을 저어 흘러 보내는데 달은 매달려서 한사코 나를 부른다. 밟힌 참나무의 부서진 잎, 나, 달, 이 순간에 숨을 죽이고 아득한 옛날을 돌아본다.
달은 말문을 열려다가 얼굴을 돌리며 입을 다물어 참나무에 떠넘기고 구름 뒤에 숨는다.
함께 영욕의 탑을 어르지만 육중한 콘크리트 괴물은 손을 젓고, 고고히 흐르는 달빛에 나뭇가지 그림자만 가슴에 새기고 말이 없다.
지금은 아무라도 붙들고 얘기 할 수 있는 때가 아니고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는, ‘소련’의 ‘소’소리이고 ‘중국’의 ‘중’소리이고 ‘북조선’ ‘조’소리이다.
입의 모양마저도 만들면 안 되는 세상이니 옆에 서있는 동료에게 내색조차 할 수 없는 내 심경을 삼킨다.
거창하게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나 자유나 사회 따위는 제치고, 내 핏속에 흐르는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만이 이런 모든 것을 압도하고 초월한다.
지금 이 자리에, 언덕과 참나무와 뼈대만 남은 콘크리트 탑과 달과 꼼짝하지 않고 서있는 나는 함께 우리만의 교감으로 과거를 풀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먼 훗날에 있을 시원한 얘깃거리만이라도 만들고 싶은 어설픈 바람이 이토록 삼라만상을 일시에 멈추게 하는 것이다.
생각만이라도 그 뜻을 밝힐 수 없는 체제의 경직성이 나를 홀로 이렇게 산천에 노래하고 달에 호소하고 나뭇가지에 대고 울부짖고 낙엽에 입대고 연민의 정을 토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도 진실은 있다. 내 안에서 흐르는 조상의 피를 부정 할 수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할아버지의 잡히지 않는 자취를 더듬으려 몸부림친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놓아두고 러시아에 가셔서 백러시아의 여인과 사셨다는, 말만 들은 나로선 러시아는 내 할아버지의 뼈가 묻힌 곳, 그래서 러시아를 생각하고 그리는지도 모른다. 그 러시아의 냄새가 지금 내 눈앞에 덩그렇게 서있는 괴물 같은 구조물에서 풍기는 것이다.
할아버지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 제정 러시아 공관의 흔적인 탑이 무엇의 잔해인지를 모른 채 할아버지의 냄새를 찾는 기 막히는 운명적 유랑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뼈대만 남은 시멘트벽에 손을 대고 할아버지의 살 갓을 어루만져 보는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할아버지가 묻힌 곳 러시아는 내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고 아무에게도 밝힐 수 없는 감추어진 수수께끼의 보물덩어리를 묻어둔 내 마음의 고향이다.
아관파천이 어땠거나 명성황후의 안위가 어쨌다는 암울한 국운은 내 입에 올리기 어려운 엄청난 무게이니 접고, 이 땅에 뿌리박은 한 민초가 조상의 얼을 새기려고 묵묵부답의 달과 벌거벗은 참나무와 뼈대만 남아서 차갑게 드러내며 허공으로 솟은 러시아공관의 첨탑에게 가루가 된 낙엽과 더불어 말없이 묻고 있다.
네가 우리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어서 귀띔해 다오.
나를 둘러싼 냉랭한 바람기가 내 목소리를 입 밖에 낼 수 없게 하는구나.
사방은 철로 막을 치고 대나무로 둘렀으니 내 손은 그곳에 닿을 수 없고 내 눈은 그곳을 넘볼 수 없고 장막은 그곳의 바람을 막아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
러시아 공관, 너희나라에서 묻힌 우리 할아버지의 유골이나마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다오. 지금은 비록 러시아, 아니 백러시아 여인의 남편이 되었던 우리 할아버지의 행적을 더듬을 수는 없지만 너희는 다 알고 있지 않느냐.
달아!
나무야!
괴물 같은 콘크리트야! 어찌하여 모른척하느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본 너희가 모른다니 나는 어디서 우리 할아버지의 자취를 더듬느냐!
역시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머리를 흔들고 아무 일이 없었듯이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모든 것은 일순의 일이었다. 나는 옆으로 비껴 뒤로 물러서는 공관 터의 콘크리트 탑을 뒤로하면서 동료에게 말했다.
‘여기가 러시아 공관 자리였다지?’
달은 참나무가지를 떠났다. 그리고 가랑잎이 날리면서 발아래 먼지가 흩날렸다. 할아버지의 대답이셨다.
‘네가 나를 아는구나! 나 여기 있다’ 내 가슴에 작은 울림이 있었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