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8.051230 정년
정년이 무엇인가! 사람이 살면서 힘 다하는 대로 한껏 살면 될 텐데 그렇지 못하다. 나는 싫은데 억지로 떠밀려서 물러난다는, 많은 사람들의 드러내 놓지 못하는 속마음일 테다. 더러는 지루하게 해를 채워서 부수적 이득을 노리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일을 사랑하고 보람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정년은 그가 속한 집단에서 그를 능력극대범위 내에서의 기여한계선(寄與限界線:?)까지만 머물게 하고서 퇴출시키는, 그 조직의 생리상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제도의 한 부분이라고 할 터다. 더 구체적으로, 생산성제고 측면에서 선택되는 구조적 문제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당하는 일이기에, 해만 때워 넘겨서 경제적 수익을 얻기 위한 일부의 사람 말고는 누구나 슬프다. 이런 물러남을 살펴보면, 자기능력의 사회공헌정점까지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그 정점을 넘어서면 슬픔으로 변해간다. 이렇게 보아서, 조직적인 행위의 극단에는 언제나 기쁨과 슬픈 사연을 싣고 있는데 개인 적인 사회활동에는 그런 정년이 있을 수 없으니 현대복합 사회의 최적 능력 제고는 집단보다는 개인의 활동에서 더 경제적 가치가 창출되어야 마땅하지만 기술과 능률의 면에서 집단을 따를 수 없음으로서 어쩔 수 없이 수용 할 수밖에 없는, 경제이론우위만의 귀결이다. 그런데 사람의 행복은 이런 경제논리로만 따질 수 없으니 딱하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성장과정에서는 정년 아닌 학제나 연령제한을 두고 있음으로서 오히려 발전하고자하는 동력의 발판이 되는데, 여기에는 즐거움도 될 수는 있지만 개성을 집단의 고유목적에 부합하도록 동질화시키려하고, 그 목적에 걸맞게 적응시키려하는데서 또 개인의 창의성과 그 가치가 묻히고 마는 우울함도 있다. 그 과정에서 짧지만 불행이 또 싹튼다. 제도권의 학교는 젖혀두고라도 생활 속에서 온갖 테두리를 만들어서 가두어 그 무리로 하여금 일정한 기준으로 물갈이를 하면서 그 집단체질을 존속하려하는 과정에서는 또 개인의 창의성조차 말살될 수가 있다.
그런데 사람의 활동에 따른 생산성을 물질적으로만 계산한다면 유목과 농경사회에서만은 그 기여도가 청 장년기에서 절정이었다고 보고 싶다. 하지만 현대사회일지라도 경제 분야 외에서 다른 가치를 찾는다면 좀 더 완숙한 노령기가 오히려 때나 경우에 따라서는 정점일수도 있겠다. 그 기준은 각 집단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기에 생각을 가다듬을 필요를 느낀다. 사람이 정년을 맞는 시기는 대체로는 환갑을 전후한 끝물이 되어 물러나게 되는 것인데, 여기서 사람들은 그런 관행에 따른 자기의 무력함을 인정하여 받아들이지만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건강 상태에 따라서, 개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모든 인간적인 일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내가 몸담고 있는 인간사회를 벗어나서 생각해보게 되는 엉뚱함이 그래서 여기 있다.
무릇 인간이외의 생물들은 수명을 다할 때까지는 자기의 능력대로 제약 없이 삶을 누리는데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람만이 여러 제약을 받는 것인가 하여 더 곰곰이 생각게 한다. 나름의 생존경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시인의 노래를 빌어, 굼벵이도 사자도 하늘의 제비도 독수리도 그리고 사람도 오늘 다 함께 정월초하루를 맞는다. 살아 있는 것 중에서 어느 것도 이날을 맞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지만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도 이날을 위해서 더 일하지 않았고 몸부림치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일까? 그것들이 스스로 의식하건 못하건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만이 정월 초하루가 있어 이렇고 저렇고 한다면 그들에게는 이날에 존재하지 않아야 하련만 그렇지 않다. 미물인들 어찌 이 순간을 건너뛰어 살아 갈 수 있겠는가? 그들 역시 이 순간을 겪고 살아야 한다면 무엇이 그들과 다르다고 우쭐댈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움직이지 않는 초목도 그들의 정월초하루는 어김없이 다가오고 봄을 맞는 것이다. 그것들이 자각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러기에 시간 앞에 모든 인위적 절차와 제약은 무의미한 것이다.
시간의 주재자는 우리를 자유롭게 했는데 사람만이 어쭙지않게 무엇을 만들고 늘였다 줄였다, 입학이다, 입회다, 정학이다, 졸업이다, 입사다, 퇴직이다, 하며 온갖 것들을 만들어서 법석을 떨면서 행과 불행을 겪는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딱히 무한시간, 정체된 채로 영원할 시간에 선을 긋고 사는 사람이 그 일생을 주어진 대로 사는 다른 생물보다는 온전히 다르게 생존해야 하는 존엄한 존재라면 더더욱 자유와 행복을 누려야 하겠건만 영악한 인간의 지식이 지혜롭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고통 받는 미물들의 일생의 속을 모르고 자꾸 그 비인간들과 비교하는 버릇에서 비롯돼서 그런지, 아무튼 행복하지 못한 것만은 우리들이 공감하고 산다, 그렇게 보아서 더욱 딱하다.
지혜로운 삶은 지식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가보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우생(優生)적인 사회발전을 도모한다는 구실에서건, 정규분포곡선 가장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꼬리부분을 인정하는 그런 사회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발버둥처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우점(優點)되기 원하여 현재적 열등부분인 꼬리부분을 제거한다 해도 우위에 있는 개체들이 영원히 존속 할 수는 없는 듯싶다. 갖고 있는 우성이 돌연한 환경변화에 살아남지 못하게 되는 때, 가장 열성에 속해있는 그 꼬리부분이 차라리 변화된 환경에 살아남도록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개체의 사회적인 현재적 조건은 그 집단에게 불합리하게 되었어도 그 중 어느 한부분이 변화한 환경에서는 다른 우수한 개체가 전멸하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소수만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특이한 인자를 갖고 있을 수도 있다하겠기 때문이다.
적절하진 않지만 예증한다면 이렇다. 소수의 두 부족이 있다. 양 부족이 생사를 결단하는 전투에서 살아남을 부족은 어떤 부족이겠는가를 살피자. 한 부족집단에는 건장한 장정만 있고 다른 부족집단에는 배내 병신이든 생활불구자든 약간의 열성 부류가 섞여 있다고 치자. 그 두 부족집단이 협곡에서 대진하여 전투를 하는 와중에 연못의 보(洑)가 터지면서 넘쳐난 물길에 양 부족의 전사들이 전멸했다고 할 때 온전한 장정만 있던 부족은 일시에 부족의 존속이 어렵도록 인구증식 불능의 경우에 빠지지만 불구자가 있었던 부족집단은 그 뒷수습이 빨리 이루어져서 오히려 건강한 장정만 있던 집단보다 우점(優點)하는, 역전이 벌어질 것이다.
이렇듯 인간사회의 어떤 실재적 사건과 실존하는 모든 것은 긴 세월 무한한 시간을 두고 본다면 나름의 의미와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리라. 해서, 정년의 개념도 짧은 생산성차원에서만 보면 보편타당 하다고 여기지만 인류의 장래를 위해서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어떤 형태로든 마련해주고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리라. 그러나 개인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력이 없어서 물러설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추진하려 들것이다. 그것은 앞서와 같이 당시의 시류인 경제적인 측면만을 생각한다면 그 측면으로만 계측한 정년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른 방법으로 정년을 정하든지 아예 정년의 개념조차 사라져야 마땅하다.
정년의 개념으로 확대해서 젊음을 가눈다면 또 다른 감회가 인다. 군을 제대 할 때는 아직 비상하려는 여지가 있어서 몰랐고 향토예비군을 연령초과로 물러날 때는 아직도 그 마지막 역할인 민방위대의 참여집단이 있어서 젊음을 기대했었는데 그 조차 나이의 제한을 받아 물러날 때는 정말로 인생대열에서 용도폐기가 되는 듯싶어서 적잖이 우울한 심경을 맛보았으니 덧없다.
나는 정년을 맞는다.
사람은 사라져 가는 시간의 밥인가! 아니면 새로운 생명을 위한 소멸인가! 초월하여 받아들이는 지혜를 찾아야겠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