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박하고 무분별하고 방탕했으며 개혁에 적대적이었다. 프랑스 혁명과 1792년 8월 왕정 타도로 이어진 민중 소요사태가 일어나도록 자극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의 11번째 딸이었으며 1770년 프랑스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왕세자와 결혼했다. 루이는 내성적이며 따분한 성격의 무뚝뚝한 남편이었으므로 1774년 루이가 왕위에 오를 무렵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총애하는 경박한 궁정 신하들의 작은 모임에 어울려 사교에 열심이었다. 그녀의 방탕한 궁정비 지출은 1770, 1780년대에 프랑스가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는 데 한몫을 했다. 또한 더욱 방탕한 궁정 귀족들과 가까이 지냄으로써 그녀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그녀가 혼외정사를 한다는 중상모략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이런 비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