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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1월 상무대 명명식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한국 통신사 수집가인 강해원(54.인천 부평구)씨가 공개한 이 사진은 당시 육군교육총감부 임선하 준장이 미국 8군 사령관인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ward Van Fleet) 장군에게 선물한 '상무대 명명기념 사진첩'에 실려 있다./연합뉴스
★*… 이승만 대통령이 상무대 포로수용소에서 죄수를 모아 놓고 점검하고 있다. 한국 통신사 수집가인 강해원(54.인천 부평구)씨가 공개한 이 사진은 당시 육군교육총감부 임선하 준장이 미국 8군 사령관인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ward Van Fleet) 장군에게 선물한 '상무대 명명기념 사진첩'에 실려 있다./연합뉴스
★*…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1월 6일 상무대 명명식에서 미8군 사령관인 제임스 밴 플리트(왼쪽에서 세번째)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국 통신사 수집가인 강해원(54.인천 부평구)씨가 공개한 이 사진은 당시 육군교육총감부 임선하 준장이 미국 8군 사령관인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Award Van Fleet) 장군에게 선물한 '상무대 명명기념 사진첩'에 실려 있다. /연합뉴스
6.25 전쟁이 남긴 초상
★*… 전란 이태째, 늦여름. 서울 영등포의 피난민 캠프에서 한 젊은 엄마가 아이들에게 참외를 깎아 주고 있다. 1951년 8월20일./연합뉴스
★*… 길거리 약국, 서울. 서울 재수복 직후인 이른 봄, 장터 길거리에 좌판 약국을 다시 연 노인. 전란의 생필품으로 인기를 모았던 디디티도 보인다. 1951년 3월19일./연합뉴스
★*… 서울이 재탈환되면서 장터도 다시 열렸다. 쌓아 올린 4단 좌판과 양철통에 그득한 김치 포기./연합뉴스
6.25 전쟁이 남긴 초상
★*… 예비회담장 유엔군 측 지역에서 영국 종군 기자 에릭 다운톤(Eric Downton, 맨 왼쪽)과 네덜란드 종군 기자 알프레드 반 쉬프링(Alfred Van Spreng)이 북한군 파견장교에게 마이크를 들이대고 있다. 1951년 7월16일./연합뉴스
6.25 전쟁이 남긴 초상 연합뉴스
★*… 휴전선 긋던 날. 공산군과 유엔군 양측의 휴전 협정 파견장교들이 지도 위에 군사분계선을 그리고 있다. 1951년 11월27일. 조선인민군 장춘산 상좌(왼쪽)와 유엔군을 대표 한 미 해병대의 제임스 머레이 대령. /연합뉴스
·Ⅱ’에 실린 이 사진들은 국내에는 처음 공개되는 것들이다. 눈빛출판사 제공
미공개 영상으로 다시 보는 6.25
★*…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은 21일 국회에서 열린 '미공개 영상으로 다시 보는 6.25' 세미나에서 미 육군 통신대가 촬영한 편집 영상을 공개했다. 학살된 여성들(진 주, 1950년 9월 27일)./연합뉴스
★*…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은 21일 국회에서 열린 '미공개 영상으로 다시 보는 6.25' 세미나에서 미 육군 통신대가 촬영한 편집 영상을 공개했다. 사진은 구덩이에 숨은 어린이를 구출하는 국군(1950년 10월 17일)./연합뉴스
끝없는 인민군 포로들의 행렬
★*… 포로들의 행진. 원산 비행장을 가로지르는 인민군 포로들의 행렬. 원산이 한국군에게 함락된 직후인 1950년 10월16일에 촬영된 이 사진은 미 7함대 소속 미주리 전함에서 발진한 헬리콥터에서 촬영된 것이다./연합뉴스
★*… 월미도 포로들. 인천 상륙 작전 직후 월미도 해변. 월미도의 한 해변 휴양소에 설치된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 포로들이 심문을 받고 있다. 6.25개전 직후인 1950년 7월에 244명에 불과했던 인민군 포로 수는 인천 상륙 작전 직전인 9월 말 3만 8천250명으로 불어났고, 10월에는 8만 1천765명으로 급증했다. 월미도의 이 포로들은 한국전 이후 다수가 한꺼번에 생포된 최초의 포로들이다./연합뉴스
★*…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이었다는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한 직후인 1950년 9월 17일. 썰물이 빠져나간 직후의 월미도 풍경이다. ‘개펄 위의 LST’라는 사진 설명이 붙어 있다./연합뉴스
★*… 넘지 못한 작전선. 1950년 11월22일 압록강 남단 신의주에 미 공군이 폭격을 가하고 있다. 압록강 북단(사진 오른쪽)인 만주와 한반도를 잇는 1천200미터 길이의 신의주교는 미 5공군 B-29의 폭격으로 12일 전인 11월10일에 이미 끊어져 있었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던 워싱턴의 북폭 자제 지시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의 주 보급선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신의주교 폭파를 명령했다. 이후 워싱턴은 ‘한만 국경 남쪽 5마일 이내 폭격 금지’ 명령을 내린다./연합뉴스
★*… 우리 집 있던 그 자리. 1950년 9월28일, 서울 동쪽. 전란 3개월 만에 잿더미뿐이다./연합뉴스
★*… 돌아온 서울. 인천 상륙에 이은 서울 수복 직후의 서울역 앞 남대문 전차길. 1950년 9월29일./연합뉴스
★*… 변소 가는 길. 부산 포로수용소 3 캠프 제4의료 구역. 미 속어인 ‘똥통(Honey Bucket)’ 스트릿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연합뉴스
통신사 수집가에 의해 공개된 6.25의 참상
★*… 맥아더 장군 등 군 지휘부가 미 제1해병대대의 상륙작전을 지켜보고 있다. 이 사진은 한국 통신사 수집가인 강해원(54.인천시 부평구)씨가 1950년 9월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 등의 모습이 담긴 사진첩 `historical diary'에 담겨 있다. 강씨는 "6.25 60주년을 맞아 전쟁의 참상을 후손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발생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공개했다"고 말했다./연합뉴스
공개된 6.25의 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