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것이다.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 하고 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것 같다.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 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한 글을 아래와 같이 남겼다고 한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ㅍ장수 정도였을 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간다.'라고 적었다.
2천의 군사로 5만 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 명장이 이렇듯 두려움에 떨 정도였으니, 이후에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 수군과 있었던전투 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가 쓴 내용에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欽崇)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적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이다.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 탄생일에 오는가 보다.
2.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그리고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은 후일 이순신 장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하루는 어두운 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 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 바람 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가 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 있는 현장으로 가는게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 영감의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의 어린 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 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 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 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보면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조선 장수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보였으니.
통제사 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3.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神宗(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 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튀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 淸國)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캐 땅 모두를 우리 明國으로 귀속 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 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 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를 보였으니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 국왕은 원균에게 조선 통제사를 제수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음에 당황한 조선 국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 수군 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 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 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 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 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害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 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 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 폐하께 忠을 다 할 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 청국) 를 견제케 하소서."
4. 책의 저자인 쟝웨이링 교수가 본 이순신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이순신, 내가 알고 있는 이순신은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장수였던 정도로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연구회엔 나의 절친한 동료 학자의 권유로 참석하였으며 그저 잠시나마 자리에 참석할 생각뿐이었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 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 터라, 나는 그저 일본 교수진들의 말만 들을 뿐.
이러한 내게 작으나마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 가득 보여지는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저런 배가 400여년 전에 있었단 말인가?(본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그 시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게 달랐다. 더군다나 그 차이는 중일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 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을 보는 것이었다.
일본 교수진들은 이 연구회를 이순신이라고 붙엿다. 즉 임진왜란 자체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서 바라 보고, 찾고, 연구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엇다. 이는 우리 중국 어느 누구에게도 연구해 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그 학술회가 끝나자 일본 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한 책자를 얻을 수 있었다.
7권은 이순신 이라는 인물에 관한 책인데. 나는 그 7권을 단 하루만에 다 읽고 말았다.
책을 손에서 놓은 뒤 내게 있어서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순신!
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지금까지 우리 중국 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조선의 왕 선조는 그들을 막지 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여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明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淸에 의해 멸하고 말지 않앗던가?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별차이 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이날 연 학술회에선 이 모든 것을 흔들어 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놓은 것이다. 바로 이순신 이라는 이름으로.
5. 장웨이링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거북선.
1997년 10월. 한번은 내게 북경대에서 초빙을 받아서 학생들과 토의를 한적이 있었다.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 온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있냐고 묻자 250명의 학생중 단 한명도 대답이 없다.
역사학자인 나도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 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난 후,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으며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영웅 중 청일전쟁 그 당시 누가 있었으면 청나라를 구할 수 있었을까?" 하고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항우. 제갈공명. 손자. 관우'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 보았고. 한참 동안 이나 내가 강단의 창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지금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 해도 결과는 마찬거지 일거라고 답해주자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한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배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전에 조선과 일본의 전생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이야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많은 학생들과 같이 참석한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하기 시작하였고여기저기서 이순신이 누구냐고 서로 묻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간단히 임진왜란에 대해서 30분정도 시간을 내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순신을 선택한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이 역시 학생중 단 한명도 알지못하였다. 단지 어느 한 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이 아닙니까?
나는 그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주었다. 바로 해군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구할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가 망한건. 아편 탓도 있고. 황제탓도 있다. 정치적 이유도 맞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 수군 장수 이순신은 5000명도 안되는 군사와 50 척도 안되는 함대를 이끌고 40만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 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번의 패배도 없이 모두 승리를 이끌어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 싸움에 휩쌓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 그러한 조선을이순신장군이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안에는 바로 이 거북선 전투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은 모두 육지에서 뛰어난 자들 이다.
그것은 우리 중국 역사에는 세계에 내놀만한 수군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은 대륙 국가였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에 질문에.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 장군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 지휘관은 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 보라. 스페인을 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 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 국가였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할 것이다.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 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 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 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꿔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이 거북선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거북선은 나대용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 수군은 인진왜란 1년전만해도 허약한 병사들이었으나 그 허약한 병사를 단 1년만에 40만 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 수 있는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1시간정도 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 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 강의가 끝났을 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 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면서.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쟝웨이린 교수는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는 주요 책임자 중 한 분이셨으며, 1990년 이 학술회를 시작으로 연구하시던 중 1995년 고구려 역사 편입 작업에서 손수 물러나셨다고 한다.
쟝웨이린 교수는 이 책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역사학자란 후세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란 두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숨기는 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것 보다 그 역사를 감추려하는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때 그것이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또 한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전한 위인이란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그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6. 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가 본 이순신
세계의 전쟁 영웅은 피로 만들어 진다. 전쟁 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 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 징키스칸도 그러했고, 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 겠다. 나는 크리스챤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 분... 이순신 장군을 볼 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두 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 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였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고 가셨다. 2000년 전의 한 청년이 그래했듯이. 이순신 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 孝. 義. 愛. 善 을 가르치신 분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 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장군"이라고...
7. 장군님의 혁명과 죽음에 대한 논란
1996. 4월 이케다 하야토 교수의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중에서(14부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혁명과 죽음> 이순신의 혁명.
우리들은 왜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 보았다.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 조정으로부터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에게는 단 한번의 혁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먼저, 우린 만일 이순신 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하 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12명의 학자 모두 이순신 장군은 혁명에 성공과 함께 조선의 멸망과 새로운 이순신의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에겐 2만여명의 수군과 약 5천여명으로 추정대는 의병.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 이남. 경상도 부근에 이순신을 따르는 軍의 수는 1만여명에 이른다. 총 3만 5천여명에 다다르고 이 군대에 대응할 조선의 군대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이순신에겐 두 가지의 또 다른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과 명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明나라의 군대였다.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곧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 하는 것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혁명 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조선의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자신을 도와 줄 군대가 올거라 생각 했지만,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 온다.
조선 조정으로가 아닌 명나라의 장수 유정에게...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의 왕 선조가 아닌 이순신 통제사의 편을 들어 줄 것이다. 왜였을까? 이 역시 답은 간단하였다.
그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임진왜란(정유재란)으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淸)의 견제가 심하였으니.. 전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번 강력한 이순신 군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나라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조선의 민심 역시 이순신에게 있는것을 알기에) 바로 이순신에게 손을 들어주는 것... 이것은 또한 명나라에게도 커다란 이득인 것이다. 힘없는 선조가 조선의 왕이 되기 보다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을 도와 그에게 왕의 자리를 주고 그 이순신의 군대로 하여금 후에 명(明)을 위협하는 오랑케를 견제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명나라의 문록(文錄)을 보면. 조선으로 건너간 명나라 장수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 의하면,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 하여금 북의 오랑케를 견제토록 하소서... 이순신 통제사는 능히 우리 明의 후환을 없애 줄 것이라 臣 진린은 굳게 믿사옵니다... 등등
이에 明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의 군대를
요동으로 이동시키자' 라는 대신들의 논의가 있었음 알 수 있었다. 이는 이미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 선조에게 우리 明의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도 明을 도우라.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게 하라. 이미 각본은 짜여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혁명을 하든 안하든... 이미 명나라에서는 훗날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왜였을까? 중국 역사와 조선의 역사의 고금을 통틀어서 이와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반드시 쿠테타든 혁명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니면 토사구팽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