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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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는 나무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소년은
초라한 할아버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잘려나간 밑둥만 남은 나무는
그에게 더 줄 것이 없어 미안했습니다.
"얘야, 이젠 네게 줄 것이 없어
미안하구나. 내 밑둥에 앉아 쉬거라"
나무의 말에 초라한 노인은
잘려나간 밑둥만 남은 나무에 앉아 쉬었습니다.
그러자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중에서 -
사철나무에 눈물과 웃음 열매가 주렁주렁
- 이은심
사철나무에 눈물과 웃음 열매가 주렁주렁
왼 쪽 가지에는 눈물 방울
오른 쪽 가지에는 웃음 열매
햇빛과 비와 바람 덕에 새콤 달콤 열렸구나
우듬지는 세상을 속이는 하늘의 서러운 눈짓
밑둥은 자기를 속이는 대지의 두툼한 입술
사철 하늘을 떠받드는 수십 수백 개 손이
파랑 노랑 빨강 주홍 고동 한꺼번에 물들어
기만과 기쁨과 도취는 눈물의 강으로 흘러가고
진리과 깨달음과 자유는 불꽃의 숲으로 타오르고
굳어진 저녁 들판 세상 풍경을 깨고
멀리서 달려오는 돌칼의 외침 하나
가을 하늘 맨 얼굴에 키쓰를 하며
푸른 불꽃 붉은 들불을 일으키고 다니는구나
사철나무 가지에 눈물 방울 웃음 열매 가득
세상 철 든 나뭇가지 사방 흔들어
배고픈 대지 입 벌린 구덩이에
후두둑 푸드득 떨구어 주는구나
자작나무 숲 그리워 달려가던 날,
- 이은심
자작나무 숲 출렁거리는 파도가
미친듯이 그리워서 달려가던 날,
그 곳에 너의 발자국이 있었으니
그로써 다행이더라
험한 벼랑 끝 돌쩌귀에
뿌리박고 선 저 소나무,
서로 흉벽을 부딪칠 듯
높이 외쳐 부르는 파도에,
비틀어진 붉은 가지로
오늘, 하늘의 곡척을 물으니
여름밤 흐르는 은하수 별들,
모두 제 궤도를 지키는 운행 ,
빛나는 윙크를 던지더라
저기 밀려오던 해일조차
앞발 치켜들고 그 자리 멈춰선
큰 곰별자리 되어있으려나
맑게 씻긴 별들 눈동자마다
이슬보다 깊은 깨우침에
땅끝 마을 낮은 지붕 마다
이로움이 모래보다 많더라
눈물의, 시간의 강가에서
기운 그물 거푸 던지던 늙은 어부,
찢긴 그물 속 붉은 협곡 건너온
독수리 눈빛도 있더라
잔디 위에 잠든 나무
- 유성순
밤이슬 촉촉이 내리는
네온사인 불빛 아래
하늘 구름 이불 삼고
소주 한 병 나뭇 가지에 걸고
잔디 위에 서성이다 쓰려진 나무
무엇이 괴로워
무슨 사연 그리 깊어
밤마다 풀잎에 하소연을 하나!
돌아 갈 곳 어느 뫼(山)인가!
철을 몰라 계절도 잊었나!
날지 못해 둥지를 찾지 못하나!
낮 거리에서 비를 맞고
햇살에 몸을 말리고
밤 거리를 헤매다 그만 그만...
신갈나무 숲에선 재즈소리 눈부시다
- 송문헌
신갈나무 숲에선 경쾌하고
활기찬 재즈를 부르고 굴참나무
우거진 곳에선 힘차고 우렁찬 행진곡
소리가 난다
초여름
숲 속에선 자주 풀빛
음악회가 열린다.
어린나무 어쩌라고
- 유성순
마주보며 맹세했던 지난 날
벌써 잊고 살았더란 말인가
지키지못할 그 약속
손가락 걸고 왜 했던가
우리 이제 손 잡고 살아 본들
얼마 남지 않은 시간뿐이라네.
지는 노을 바라보며
영원토록 함께 살자 더니
해는 떠서 중천에 있는데
꿈이 많은 사랑나무
텃밭에 외롭게 버려 두고
서산에 지는 해를 따라 가버리면
텃밭에 뿌려둔 어린 나무 어쩌라고
사랑도 행복도 버리고
부모 형제 보는 앞에
혼자 서산으로 가버리면
텃밭에 뿌려둔 어린 나무 어쩌라고
감나무 잎새
- 우종복
마당 한켠
감나무에
흐드러지게 매달린
감이 탐스러워
욕심을 내보았더니
아직 설익은 풋감이라네
부끄러운
마음에
감나무 잎새 하나 따서
가방에 넣고
집에와
그 위에 편지를 쓰네
- 모든 것은 때가 있느니라 -
소나무
그대는 아는가
굳이 양지쪽이 아닌 온기를 면할
그 만큼의 따사로움이
전신을 휘감으면
영락없이 또 다른 색깔로 피어나
셀 수 없을 만큼 허물 벗는,
그리하여 나를 괴롭히는 것이
그대인 것을
그대는 아는가
수많은 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불덩이보다 더 뜨거운 가슴
삭이고 삭이며
나타낼 수 없는 나를 죽이고
그대에게 호응하는 나를
그대는 아는가
따스한 손길이 그립지만
누가 내 손을 어루만져 주겠는가
이 냉랭한 계절에
계절마다 옷을 바꿔 입고
가슴이 뜨거운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만
늘 푸르러야 하는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
그대는 아는가
그리하여
간들간들 휘어진 허리로 희롱하는
봄바람이 불어와 잠 못드는 밤
수 천의 몽우리로 피어나
밤새 서걱이다
아침이면 솔가리 한 움큼으로
혼절하고 마는 것을
어느날 나는 나무꾼이 될 것이다
- 김종제
어느날 나는 나무꾼이 될 것이다
아니 나는 나무꾼이 분질러 놓은
나무가 될 것이다
아니 나는 나무꾼의
시퍼렇게 날 선 도끼가 될 것이다
이제 선녀도 나무도 없는
마른산에 올라가
먼저 내마음을 도끼로 가른다
천둥 번개로 흐려졌다가 맑아졌다가
꽃 피고 지고 좋아졌다가 싫어졌다가
기우뚱 하며 새벽으로 기우는 달
아아,
강에 가면 물이 되고 싶었지
아아,
산에 가면 꽃이 되고 싶었지
가고 싶은 그 길로 한참을 가다가
저 환장할 푸른 하늘을
도끼로 번적 내려친다면
아아,
나는 세상을 번쩍 하고 가르는
한 줄기 빛이 되고 싶었지
오랫동안 산자락으로 덮어 감춰둔
핏자국 무섭게 드러나거나
수백년 묵혀두었던 멍석 속의
저 폐허 같은 저 칠흑의 어둠 같은
저 누더기의 저 만신창이의
어리석고 부끄러운 저 상처투성이의
하늘을 도끼로 내려친다면
허물을 뒤집어쓴 채 악취가 나는
저 햇빛 가진 하늘을 도끼로 내려친다면
그리하여 너는 너 나는 나 하면서
무너져버리는 집에 우리가 서 있다가
이 세상 주인 누구냐
나와 보아라 나와 보아라 하면서
소나기, 이 세상 뒤집어놓으려고
한꺼번에 쏟아진다면
새,
화들짝 놀라며 멀리 날아간다면
나비,
그리운 선녀처럼 하늘하늘 춤춘다면
이 세상,
나무꾼의 도끼를 들어
마구 마구 반쪽으로 가른다면
어느날 나는 나무꾼이 될 것이다
어느날 나는 나무꾼의 도끼가 될 것이다
강가에 나온 버드나무
- 정숙진
강물은
흐르지 못한 몸
술술 씻어 내리고
버드나무는
긴 겨울잠에서
뜨지 못한 눈 깨어나
초롱초롱 눈 달고
입을 열어 종알거린다
조용히 흐르는 물
저들끼리 재잘거리는데
강가에 나온 버드나무
반갑다고 길게 내민
손끝에 사랑이 담겨있다
바라보던 바람
씽긋 미소 짓고
멀리 서 날아드는 새
버들잎 물고 난다
100년짜리 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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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짜리 참나무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조급병이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하는 것보다
급성장을 좋아한다. 급성장을
자랑거리로 삼는다.
어떤 버섯은 6시간이면 자란다.
호박은 6개월이면 자란다.
그러나
참나무는 6년이 걸리고,
건실한 참나무로
자태를 드러내려면 100년이 걸린다.
-강준민의 ≪뿌리깊은 영성≫ 중에서-
단풍나무(동시)
- 민경교
어여쁜 단풍나무가
이사를 간데요
넓은 광야가 보이는
옥상으로
이사를 간데요
옥상에는
안방
사랑방
집 단장이 한창 이래요
이 밤이 가고
새 봄이 오면
더 예쁘게
동산도 만들어 준데요
나무를 심자
- 유성순
산에도 나무를 심고
가슴에도 나무를 심자
산에는 꽃피는 나무를
가슴에는 향기로운 사랑 나무를
사월오일 청명한식날
산도 푸르게
마음도 푸르게 사랑나무를 심자
산에는 꽃피는 나무를
가슴에는 향기로운 사랑 나무를
나무에게
- 안병찬
거세게 삶을 몰아치며
아프게 한 이 겨울에
혼자만의 슬픔은 아니었을
같은 모습의 네가 서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듯 펼쳐진
일상의 갈래는
작은 여유로도
하늘을 누리며 봄을 맞는다.
그래!
너와 나는
모든 게 다르지만
한 언덕 위에
하나의 빛을 받으며
나란히 서 있는 단정함.
너와 나
닮은 곳은 뿌리였을지 모른다.
고로쇠 나무
- 민경교
아비는 지하에서
돌 뿌리를 돌며
깊게 멀리 땅을 파신다
앞가슴이 뚫리고
젖줄이 새는
어미의 아픔도 모르고
곱게 푸르게 태어날
자식을 위해
지금도 땅을 파신다
풍경소리도 들리지 않는
저 암흑 속에서
묵묵히 땅을 파신다
나무
가만히 서 있다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는 길이 멀수록
등 굽히고 낮게 쉬어가고자 함이다
동행하던 빛들이 피곤하여 눕고
나뭇잎조차 떨어져 나 홀로 남았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배설물 뿌리까지 스며도
참고 견디어야한다
내 속을 빠져나간 수분 따라
나이테로 금을 긋던 수런거림,
봄바람의 안부는 발등에 젖은 냄새를 털고 있다
기다림이 깊을수록 설레임이 깊고
침묵은 강 같이 흐른다.
아무리 멀리 간 들
봄이면 돌아와 내 앞에 설 기쁨 한줄기.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 - 효림 스님의 《힘든 세상, 도나 닦지》 중에서 -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산중에 있는 나무들 가운데
가장 곧고 잘생긴 나무가
가장 먼저 잘려서 서까래 감으로 쓰인다.
그 다음 못생긴 나무가
큰 나무로 자라서 기둥이 되고
가장 못생긴 나무는 끝까지 남아서
산을 지키는 큰 고목나무가 된다.
못생긴 나무는 목수 눈에 띄어 잘리더라도
대들보가 되는 것이다.
너희들도 산중에서 수행하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못난 사람, 재주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산을 지키는 주인이 되고
불교계의 거목이 되는 것이다.
부디 초발심에서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
- 효림 스님의 《힘든 세상, 도나 닦지》 중에서 -
암벽 소나무
- 차 영섭
솔방울 연잎 사이
어머님 품에 안겨 있었지
거센 바람 날 몰아
허공 헤매다가
날개 접고 움 튼 곳이
산새들도 멀다 하는
여기 만잠봉 긴 절벽
내 삶의 터전 됐습니다.
낭 끝에 매달려
떨어지면 죽는다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꼭꼭 틈새 비집고 뿌리 내렸어요.
오랜 세월
바위 틈새에 끼어
쓰라린 고통 참아내고
꽃을 피우는
이젠 으젓한 성인
자식들도 몇 살림 차려 주고
이웃 터에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저 가끔씩 뿌려 준 빗물 아끼며
나는 멀리서 쳐다 보는
나를 내려 봅니다.
나무
- -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중에서 -
나에게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게로 가서
등을 기대고 서 있곤 했다
내가 나무여 하고 부르면 나무는
그 잎들을 은빛으로 반짝여 주고,
하늘을 보고 싶다고 하면
나무는 저의 품을 열어 하늘을 보여 주었다
저녁에 내가 몸이 아플 때면
새들을 불러 크게 울어 주었다
내 집 뒤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비가 내리면 서둘러 넓은 잎을 꺼내
비를 가려 주고
세상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을 때
그 바람으로 숨으로
나무는 먼저 한숨지어 주었다
내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할 때면
나무는 저의 잎을 버려
버림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