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悲歌)

글 두레 2011. 11. 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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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悲歌)

나는 아직 살아있다.

나를 따돌린 세상 사람이 저들끼리 무리저서 멀리 떠나가며 아련히 사라져간다. 남겨진 나, 손 모아 나발 만들어 외치고 팔을 저어 허공을 싸질러도, 발을 굴러 동동거려도, 들은 듯 만 듯 가물가물 떠난다.

세상을 등지고 가는 사람, 세상에 있어도 그들만의 관심을 쫓아 손사래를 치며 떠나간다.

이제 저들과 멀리 떨어진 내 발밑에 붉은 노을의 그림자가 비치는데, 아직도 내 뒤에서 내 그림자를 지켜보며 손짓하는 이가 있다.

벅차다.

가물거리는 지난 세월, 이타래를 풀 실마리가 되어 내 끈과 이어서 자아보려는, 불현듯 이는 스침. 이를놓치지 않으려 여기 그 글을담아 그 위안으로 내고향길을 떠난다.

세대를 달리한 공감의 끈이다. 더 후세대들에게 통한의 앞 세대가 부끄러이 지나간 자취를 어루만지게 하려는 또 다른 애끓는 내 심정의 토로(吐露)다. /8032.111103 외통

6·25전쟁 포로 출신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다

어린 나를 앞에 앉혀두고 기구한 삶을 들려주던 아버지의 눈물이 생각나

북쪽에 처자를 남겨두고 한국을 선택한 아버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힘겨운 시대를 살아낸 아버지를 위한 輓歌 쓰고싶어.

▲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아버지는 거제도를 거쳐 광주의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6·25전쟁 포로 출신이었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 1남1녀를 둔 스물아홉 살 가장(家長)이었던 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 직후 유엔군 진격 때 고향인 황해도 봉산에서 붙잡혔다.

광산김씨 동족부락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광복 후 농협 수매소에서 일하셨는데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처럼 공산당원이었다고 한다.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이 때문에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으로 포로수용소에 끌려오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 포로 석방 때 아버지는 남쪽을 선택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아버지도 분단이 이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아버지가 포로수용소에 있던 1950년 12월 북에 있는 아내가 만삭의 몸으로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분은 엄동설한의 서울에서 아이를 낳은 직후인 1951년 1월 중공군의 공세로 서울이 함락되는 와중에 황해도로 돌아간 것 같다. 아버지의 북쪽 가족이 모두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나서였다.

나를 낳으신 어머니도 황해도 피란민 출신이었다. 전쟁 직후 거리에서 배추를 팔다가 친척 소개로 아버지를 만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천성이 낙관적이고 억척스러운 분이었다. 그 덕에 아버지와 가정을 꾸린 초기에는 먹고 사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셨지만, 즉흥적이고 계산 없는 확장으로 그나마 없는 살림을 거덜 내기도 하셨다.

남쪽에 남기로 한 아버지의 선택 덕분에 나는 1955년 서울서 태어났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가세(家勢)는 급격히 기울었고, 1974년 시작한 대학생활의 대부분을 '하꼬방'같은 판잣집에서 보냈다. 1년 정도 학교 실험실에서 먹고 자기도 했다. 이 시기에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까지 나빠져 떠돌이 생활을 한 끝에 쉰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지금도 기억난다. 어린 나를 앉혀 놓고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뿌리 뽑힌 삶을 살아야 했던 당신의 내력을 말씀하시며 흐느끼던 장면이. 서울 시흥3동 달동네 고개 중턱에 살 때 깡마른 몸으로 물지게를 메고 올라가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몸 누일 곳이 없어 철거가 진행 중인 판잣집에 들어가 의식불명으로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몇 주 후 내 꿈에 나타나 "사과가 먹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을 나는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남쪽에서 아버지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나의 연민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는 다른 피란민들처럼 잘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의 마음속에는 북쪽에 두고 온 가족과 삶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러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결혼하여 아내와 두 자녀를 두고 보니 아버지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젊은 시절 도움받을 곳이 없어 막막할 때 그래도 나는 아버지보다는 나은 조건이 아닌가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다.

나는 6년 전부터 아버지를 기억하는 친지들을 만나 아버지의 삶을 하나씩 복원하면서 기록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릴 최소한의 의무감이 작용했고, 아버지의 지난한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문(自問)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해 알아갈수록 격변의 한국 현대사 속에서 아버지 같은 소시민이 살았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사람들은 서로 만나 가정을 꾸렸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생명을 꽃피우면서 다시 희망을 기대할 수 있는 오늘의 우리 사회가 생겨났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그 결과 다시는 사람이 이념과 정치조직에 희생되는 일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이 기록은 야만의 전쟁터에서 어렵게 살아남아 오늘의 나와 내 가정을 있게 해준 아버지를 위한 자식의 만가(輓歌)라고 생각한다. 오늘 저녁상에 아버지께 며느리가 정성스럽게 구운 고기 안주에 소주 한 잔 따라 드릴 수만 있다면…. 이룰 수 없는 꿈이란 걸 알기에 더욱 간절하다.

/김선영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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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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