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의 바다에서
1
해질녘의 바다에 홀로 서서
마지막 기도처럼 어머니를 부르면,
나도 어머니가 된다.
세월과 함께 깊어 가는 사랑을
어쩌지 못해 그저 출렁이고
또 출렁이는 것밖엔
달리 할 말이 없는
파도치는 가슴의 어머니가 된다.
2
바다에서 오랜만에 건져 올린
나의 시어(詩語)들에선
늘 비릿한 파래 내음이 난다.
얼마나 더 오래 말려 두어야
비로소 하나의 시가 될 수 있을까.
3
아름답고 쓸쓸하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해질녘의 바다는...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촛불이 타오르는 기도실에
고요히 무릎 꿇고 있는
내 마음처럼.
4
바다에 나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면
지금껏 나만을 생각했던 일을
바다에게 그만 들켜 버린 것 같아
매우 부끄럽다.
이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고 용서하며
한 마디의 기도라도
날마다 남을 위해 바치고 싶다.
내가 할 일도 조금씩 줄이면서
좁은 마음을 넓은 마음으로
바꾸어 오고 싶다.
5
내가 사랑한 것보다
몇 배나 많이 받아서 더 무거운
살아 있는 마음의 무게,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의 무게.
이 무게를 바다에 내려놓고,
오늘은 남빛 옷을 걸치고 있는
끝없는 수평선 위에
내 마음을 눕힌다.
6
바다! 영원을 향한 그리움은
처음부터 그에게 배웠다.
그는 무작정 나를 기다려 주는데,
어느 때나 열려 있는 푸른 문인데,
나는 왜 종종 그가 두려울까.
7
지는 해를 바라보는
저녁 바다에 서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라져 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사랑은 남아도, 사랑했던 사람들은
매일 조금씩 죽음의 바다 속으로
침몰해 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새로이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8
내가 저녁기도를 바치면
어느새 내 옆에 와서
시편을 읊는 바다.
더 낮아지라고 한다.
더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며
겸손의 해초(海草)가 자라는
물 밑으로
더 깊이 내려가라고 한다.
9
무엇이 배고픈가,
오늘은 바다가 울고 있네.
내 탓으로 흘려버린
사랑의 시간들을
채 줍지 못해 안달을 하던 내가
가슴을 움켜쥐고 그 바다에
누워 아이처럼 울고 있네.
10
저녁노을 가슴에 안고
온몸으로 하프를 켜는 바다,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춤을 추네.
물 위에 앉아
잠시 뜨거운 그리움 식히다가
다시 일어서서
춤을 추는 새가 되네.
11
해질녘 바다에 서면
나는 섬이 되고 싶어.
'함께'이면서도 '홀로'일 줄 아는,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고독하면서도 행복한,
하나의 섬으로 솟아오르고 싶어.
세상이란 큰 바다 위에
작지만 힘차게 온몸으로
노래하며 떠 있는
희망의 섬이고 싶어.
/이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