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北魏) 사람 조염(趙琰)이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있을 때, 고관이 편지를 보내 청탁을 했다. 그는 물속에 편지를 던져 버리고 이름도 쳐다보지 않았다. 진(晉)나라 공익(孔翊)은 낙양령(洛陽令)으로 있으면서, 뜰에 물그릇을 놓아두고 청탁 편지를 모두 물속에 던졌다. 질도(郅都)는 제남(濟南)의 수령이 되어 가서 사사로운 편지는 뜯어보지도 않고, 선물과 청탁을 물리쳤다. 진태(陳泰)는 병주태수(幷州太守)로 있으면서 장안의 귀인들이 보낸 편지를 뜯지도 않고 벽에 걸어두었다. 다시 부름을 받아 올라가자 그 편지를 모두 본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마준(馬遵)이 개봉윤(開封尹)이 되자 권세가와 호족의 청탁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이 청탁하면 잘 예우해서 면전에서 꺾어 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후 일 처리는 일절 사사로움 없이 법대로만 처결하였다. 포성현(蒲城縣) 주부(主簿) 진양(陳襄)도 읍내 세족(世族)의 청탁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갑작스레 법으로 다스리지 않고 좋게 타일렀다. 송사(訟事)에는 반드시 몇 사람을 함께 입회케 하여 청탁하는 자가 입을 떼지 못하게 했다.
개봉지부(開封知府) 포증(包拯)은 사사로운 청탁이 절대 통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염라대왕 포노인(包老人)으로 불렀고, 기주자사(冀州刺史) 왕한(王閑)도 사사로운 편지를 뜯지 않고, 호족들을 용서치 않아 왕독좌(王獨坐)로 불렸다.
다산 정약용이 금정찰방으로 내려가 있을 때, 홍주목사 유의(柳誼)에게 편지를 보내 공사(公事)를 의논코자 했다. 그런데 끝내 답장이 없었다. 뒤에 만나 왜 답장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으니, "벼슬에 있을 때는 내가 본래 사적인 편지를 뜯어보지 않소" 하고 대답했다. 심부름하는 아이를 불러 편지 상자를 쏟게 하자, 봉함을 뜯지 않은 편지가 수북했다. 모두 조정의 귀인들이 보낸 것이었다. 다산이 입이 나와 말했다. "그래도 내 편지는 공사(公事)였소." "그러면 공문으로 보냈어야지." "비밀스러운 내용이라 그랬소." "그러면 비밀공문이라고 썼어야지." 다산이 아무 말도 못했다. '목민심서' '율기(律己)' 중 '병객(屛客)'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