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수용소 VIDEO
▲ 거제도 포로 수용소 강제송환에 반대하는 반공포로와 송환에 응해야 한다는 친공포로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있어 결국 폭동 발생으로 많은 수의 반공포로들이 희생 ...
▲ Koje Island POW Camp : a burning village, summer 1952. The US Army removed the villagers and burned their houses because they were helping the POWs
▲ 1950년 인천상륙작전 직후 월미도 위락 시설에 임시로 설치된 포로수용소
▲ 1950. 7. 5. 국군 헌병이 인민군 포로를 붙잡는다
▲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하는 반공포로들. 예상치 못한 전광석화
▲ 마산에 6.25전쟁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잊혀져가는 포로수용소를 찾아 보았습니다. 뒤에는 청량산이 둘러 있고 앞에는 바다가 있는 천혜의 ...
▲ 거제포로 수용소
▲ 반공포로가 석방된 뒤, 텅빈 마산 제7포로수용소
▲ 북한군 포로들의 거제포로수용소 철조망에 내건 스탈린의 초상화와 김일성의 초상화
▲ 중립국행을 결정한 반공포로들. 태극기를 앞세우고 판문점 포로수용소를 떠나고 있는 모습
▲ 전쟁 중 붙잡힌북한군 포로의 수는 약 16만 명이었고중국군 포로의 수는 약 2만명에 달했다.
▲ 전쟁이 포로석방 때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여러 번에 걸쳐 발생한 포로들의 저항은 한국정부의 반공전선을 해체하려는 움직이었다. 인민군 포로들이 "제네바협약대
▲ 잊혀가는 역사 ‘부산 포로수용소’
▲ 거제포로 수용소(자료사진)
▲ 마지막으로 반공과 친공 포로 사이의 충돌을 이야기하며 친공 포로들의 잔학성을 살짝 부각시키지만... 사실 그건 포로수용소 관리의 잘못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장이 막 포로들의 포로
▲ 전쟁이 포로석방 때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여러 번에 걸쳐 발생한 포로들의 저항은 한국정부의 반공전선을 해체하려는 움직이었다. 인민군 포로들이 "제네바협약대
▲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포로수용소나 프란체스카 여사의 영상은 있었지만 PW 도장을 찍는 장면이나 구호활동을 하는 모습은 처음 공개됐으며 지방의회 선거 과정이 ...
▲ 거제포로 수용소
▲ 수용소로 들어가는 중공군 포로들. 수용소 지역은 고현지구입니다.
▲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의 포로들.
▲ 잊혀져가는 거제포로수용소를 아십니까??
▲ 거제도 포로 수용소 1953 / Koje-do POW Camp 1953
▲ 6.25 한국전쟁-127 (거제도 포로수용소)
▲ 거제도 포로수용소
▲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폭동으로 부상당한 포로를 병원으로 운반하는 경비병
▲ 거제도 포로수용소 안에서 공산포로들에 의해 학살된 반공포로들
▲ 거제도 포로수용소
▲ 1951년 9월의 거제도 포로 수용소-북한군 여자 포로들의 집합 모습
▲ YPRF(청년혁명전선)
▲ 거제포로수용소 폭동 사건 이후 재정비중인 1캠프.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의 폭동이 일어나자 유엔군이 이를 진압하고 있다.
▲ 거제포로수용소 전경
▲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폭동 진압
▲ 사진은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전경
▲ 거제 포로수용소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의 폭동이 일어나자 유엔군이 이를 진압하고 있다.
▲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이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북한의 김일성 등 공산정권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
▲ 하루아침에 사람들로 들끓었던 거제도
▲ 중공군 포로들이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1951년 雙十節(10월10일)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 거제도포로수용소는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1951년 2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운영했다.
▲ 수용소로 들어가는 중공군 포로들. 수용소 지역은 고현지구입니다.
▲ 보이자 획득된 포로들을 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최후방의 부산으로 이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부산에 집결된 포로는 14만 여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였는데, 그것은 10개 사단 규모의 북
▲ 약 300명의 포로가 수용 되었던 흥남수용소는 서울과 인천수용소 이후에 만들어졌다. 이곳이 포로수용소임을 뜻하는 지붕에 쓰여진 PW는 폭격을 막아내기 위한 표시이기도 하다.
▲ 사진은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 전경
▲ 1950. 8. 18. 포로들이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있다
▲ 부인하는 각서를 공산측에 전달. 7.25 유엔軍司, 포로 교환에 관한 18개의 비밀 회담 무성과라고 발표. 8.10 1천1백명의 민간인 억류자 석방. 8.11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83명 부상.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발발한 폭동을 진압하고 있는 UN군
▲ 당시 거제포로수용소 포로들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여러 번에 걸쳐 발생한 포로들의 저항은 한국정부의 반공전선을 해체하려는 움직이었다. 인민군 포로들이 "제네바협약대로"를 외친 이유도
▲ 1950년 거제포로수용소 북한 포로들의 나체 검색 사진
▲ 포로수용소 유엔군 기간병들이 이를 잡고자 포로들에게 디디티를 살포하고 있다(거제포로수용소, 1952. 5.).
▲ 중소도시 규모인 최대 14만명의 포로까지 수용하였던 거제도수용소
▲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이용된 포로들
▲ 林輝:中共威逼誘騙戰俘回國與其之後遭遇
▲ 구역을 옮겨와 지문을 찍고 있는 중국군 포로
▲ 게제포로수용소 포로들이 야외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교육을 받고 있다
▲ 점심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제93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
▲ 제76포로수용소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중국군 포로들
▲ 1952년 5월 광주 빨치산 포로수용소의 모습. ‘백 야전전투사령부’는 빨치산 토벌에 착수하기 전 광주와 남원에 포로수용소를 먼저 세웠다. 토벌이 진행되면서 많은 빨치산이 붙잡혀 왔다
▲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이용된 포로들
▲ 거제포로 수용소
▲ 옷이 벗겨진채 미군에게 검색당하고 있는 북한포로 (1950. 8 월미도)
▲ 가장 규모가 컸던 거제수용소
▲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등을 일으켰다. 보트너는 1952년 6월 10일부터 포로를 분산 수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등을 일으켰다. 보트너는 1952년 6월 10일부터 포로를 분산 수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 1953년 포로교환협정에 따라 문산을 통해 들어오는 부상 국군포로들. 하지만 송환된 포로들보다 훨씬 많은 포로들이 북한에 억류됐다.
▲ 부산 임시 포로 수용소
▲ 휴전 후 포로수용소에서 인천항으로 수송되어 온 인민군 포로들. 삼엄한 감시 속에 LST에서 내리고 있다. 이들은 인천에서 판문점으로 이동, 포로 송환 협정에 따라 ...
▲ 1954년 1월 22일 대만으로 향하는 수송선 안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중국군 반공 포로들
▲ 한국 6.25 전쟁 당시 대구 포로수용소에서 국군 헌병에 의해 전쟁 포로로 등록되는 북한군 포로 - 1950년
▲ 거제도포로수용소(Koje POW Camp)는 한국전쟁 당시 사로잡은 조선인민군과
▲ ... 항의 시위구호가 걸린 거제도 포로수용소 ...
▲ 거제도에 수용된 북한군 포로.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인천상륙작전후 생포된 약 17만명의 포로가 수용돼 있었다. 거제도는 포로관리에는 용이한 점이 있었지만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