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여시족(法如是足)
한문제(漢文帝)가 지나는데 백성 하나가 다리 밑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말이 놀라 황제가 크게 다칠 뻔했다. 백성은 이제 지나갔겠지 싶어 나왔다가 놀라 달아났던 것이었다. 문제가 그를 정위(廷尉) 장석지(張釋之)에게 넘겼다. 장석지는 벌금형을 내린 후 그를 석방했다. 임금은 고작 벌금형이냐며 화를 냈다. 장석지가 대답했다. "법은 천자가 천하 백성과 함께하는 공공(公共)의 것입니다. 법이 그렇습니다. 더 무겁게 적용하면 백성이 법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그를 베셨으면 몰라도, 제게 맡기셨으니 저울에 달 뿐입니다." 문제가 수긍했다.
이번엔 어떤 자가 한고조(漢高祖) 사당 앞의 옥환(玉環)을 훔쳤다. 장석지는 종묘의 물건을 도둑질한 죄안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황제는 삼족을 멸해도 시원찮은데 사형에 그치다니 말도 안 된다, 내가 종묘를 받드는 뜻에 맞지 않는다며 펄펄 뛰었다. 장석지가 관을 벗고 말했다. "법으로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法如是足). 지금 만약 종묘의 그릇을 훔쳤다고 족멸(族滅)이라 하셨는데, 만에 하나 어리석은 백성이 고조 묘의 한 줌 흙을 파낸다면 폐하께서는 어떤 법을 더하시렵니까?" 고작 옥환 하나가 아니라 도굴을 하는 자가 나오면 무슨 법을 적용하겠느냐는 말이다. 황제가 이번에도 그의 말을 따랐다.
감정에 치우쳐 법의 잣대를 임의로 들이대면 당장 분은 풀리겠지만 기준이 무너진다. 법은 국가의 위의(威儀)다. 촛불이 아름다웠지만 절차에 따라 헌재의 결정을 거쳤기에 더 멋지다. 당장 감옥에 처넣고 싶겠지만, 법의 논리에 따라 정유라를 석방한 것도 근사하다. 답답하고 에돌아가 속이 터져도 법의 절차를 따르는 것이 맞는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그간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여러 조처가 있었다. 꽉 막힌 물꼬를 터주는 결단을 환영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대통령의 한마디로부터 나와서는 안 된다. 억울함과 시원함에도 법과 절차가 필요하다. 특히나 최근 가야사 복원 논의는 대통령이 내릴 수 있는 지시가 아니다. 국정 교과서의 발상과 무엇이 다른가? 법 위의 법은 없다. 적폐를 청산하자며 새 폐단을 만들면 안 된다.//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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