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1785~ 1840)이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 ~1845)에게 편지를 보냈다. 서두의 인사가 이랬다. '매화의 일은 이미 지나가고, 수선화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너무 적막하여 마음을 가누기 어려운 아침입니다.(梅事已闌, 水仙未花, 正是寂寥難遣之辰.)' 분매(盆梅)의 매화꽃은 이미 시들고, 구근에서 올라온 수반 위 수선화 꽃대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 꽃 진 매화 가지에 눈길을 주다가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수선화 꽃대로 시선을 옮겨본다.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겠다. 그러다가 문득 그대 생각이 나더라는 얘기다.
신위는 답장 대신 '수선화' 시 세 수를 지어 보냈다. 그 둘째 수는 이렇다. '얄미운 매화가 피리 연주 재촉터니/ 고운 꽃잎 떨어져 푸른 이끼 점찍는다./ 봄바람 살랑살랑 물결은 초록인데/ 눈길 고운 미인은 오는가 안 오는가?(無賴梅花 笛催, 玉英顚倒點靑苔. 東風吹縐水波綠, 含睇美人來不來.)' 시의 사연은 이렇다. '매화가 피면 그대와 함께 달빛 아래 피리를 불며 꽃 감상을 함께하고 싶었소. 그런데 하마 그 꽃잎이 떨어져 푸른 이끼 위에 흰 점을 찍어 놓았다니 애석하구려. 봄바람은 수면 위에 잔주름을 만들고 물빛은 초록이 한층 짙어졌습니다. 이 같은 때 눈길 그윽한 미인은 언제나 그 고운 자태를 피워낼는지요. 우리의 요다음 만남은 수선화가 필 때로 정하십시다.'
학연(丁學淵)의 척독(尺牘)을 모아 엮은 '척독신재(尺牘新裁)' 속의 짤막한 편지 한 통은 사연이 이렇다. '골목길의 수양버들이 이미 아황색(鵝黃色)을 띠자 유람의 흥취가 불쑥 솟는군요. 송기떡[餠]과 꽃지짐[花糕], 청포묵[菉乳]과 미나리가 요맘때의 계절 음식인데, 오늘 아침 시장에서 보았습니다.' 아황색은 노란색에 가까운 연둣빛이다. 가지에 노랗게 물이 오르는가 싶더니 연둣빛의 새잎이 아련히 돋아났다. 청포묵을 쑤어 미나리에 무쳐 먹으니 겨우내 군내 나는 묵은 김치에 시큰둥하던 입맛이 단번에 돌아온다. 송기떡과 화전도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밖은 떠들썩한데 내면은 적막하다. 이 꽃 봄에 편지로 오가던 옛 사람의 마음과 입맛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