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죽은 후에는 어찌 되는 것일까. 來世니 저승이니 하는 사후관계란 과연 있는 것일까? 있다면 그 곳은 어떠하며 우리는 장차 어떠한 모습으로 그 곳으로 가는 것일까? 더욱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고, 자기가 어떤 종교를 가졌던지 혹은 종교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각각 자기 나름의 死生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었더라면 종교는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인간의 죽음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는 허다한 종교 중에 내가 신봉하고 있는 종교는 어떤 것이며,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나의 사생관은 과연 어떤 것인가? 내 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은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현대 지성인으로서의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멀리 석양노을을 바라보며 한 번쯤 깊은 사색에 잠겨 봄직한 일이다.
1. 유교(儒敎)
유교에서는 천지만물이 음양(陰陽), 오행(五行)이라는 기(氣)의 집합으로 생겨나고, 또한 그 기의 흩어짐으로 없어지다고 한다. (聚則生 散則滅)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의 모임으로 태어났다가 그 기의 흩어지는 현상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다만 기에는 맑고 흐리고, 깨끗하고 더럽고, 순수하고 잡된 것이 있는데 사람은 그 중에서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것만을 받았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되었지만 기의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生成消滅 점에 있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다 같은 자연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날아가고 넋은 흩어진다(魂飛魄散)하여 날아가는 혼을 불러들이려고 亡人의 체취가 배인 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흔들면서 혼을 부르는 초혼(招魂)의 절차를 밟는다.
죽음 뒤에도 살아지지 않는다고 믿는 혼백(魂魄) 역시 음양의 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시일이 지나면 마침내 흩어지는 것이고, 자연으로 돌아간 기는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유교에서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한 번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자손을 통하여 代를 이어 감으로서 그 허무함을 달래고 영생의 욕구를 대신하려 한다. 대가 끊어지는 것은 영생이 단절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들을 못나면 아내를 쫓아내는 七去之惡이니 다른 여인에게서 아들을 낳아 오는 씨받이니 하는 습속(習俗)이 생겨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生과 死를 天命(우주의 섭리)에 따른 氣의 集散으로 볼 때 인간의 죽음 역시 자연의 기로 돌아감이다. 자연은 인간의 모태(母胎)요, 본래의 고향이다. 따라서 죽음은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 자연과의 영원한 合一이다. 우주는 영존(永存)하는 것임으로 우주와의 합일인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변형된 영존의 시작이라 할 것이다.
2. 도교(道敎)
유교와 더불어 중국에서 발생한 도교 역시 내세보다는 현세에 중점을 둔 종교이다. 유교가 내세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자손손 대를 이어 감으로서 영속성을 유지하려 했다면, 도교 역시 내세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죽는 것이 너무도 허무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長生不死와 신선이 되는 성선(成仙)의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도교의 대표적 저서인 포박자(抱朴子)를 쓴 晉나라의 갈홍(葛弘)은 불교처럼 삶과 죽음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것이나, 유교처럼 죽고 사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죽음을 피하고 수명을 늘리는 일에 힘써 궁극적으로는 신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하지만 천지는 다함이 없고, 사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지만 거북과 학은 오래도록 산다 고 하면서 어찌 사람이 오래 살지 못하겠느냐고 그는 갈파한다.
그래서 초기 외단(外丹)에서는 불로초나 불사약 같은 것을 추구했지만 끝내 실현하지 못했고, 후에는 내단(內丹)으로 방향을 바꾸어 정신적인 수양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현실적으로 죽음에 봉착한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도교에서의 인간의 죽음에 대한 해석은 독특하다.
도를 닦아 신선이 된 사람은 죽은 체하고 평범한 의식에 따라 땅에 묻히지만 자기의 옷이나 지팡이에 시체의 모습을 담아 관 속에 남기고, 정작 자기는 무덤에서 빠져나가 영생하는 사람들이 사는 신선세계로 간다고 한다.
이것이 곧 도교에서 말하는 시해(尸解)요, 시해선(尸解仙)이다. 당당하게 선계(仙界)로 올라가지 않고 은밀히 하는 이유는 범인(凡人)들의 일상 사회를 혼란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니 과연 선인(仙人)다운 배려라 할 것이다.
3. 불교(佛敎)
같은 동양권이면서도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유교나 도교와 달리 내세관이 뚜렷하다. 죽음은 곧 다른 삶의 시작이요 종말이 아니라고 본다. 전생(前生)의 업보(業報)에 따라 금생(今生)에 태어나서 다시 업을 짓고 죽으면 그 업과(業果)에 따라 내세가 열리지만 반듯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으로 또는 축생으로 각자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 윤회유전(輪廻流轉)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업(善業)을 닦고 내세를 예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형태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사바세계에서 生老病死의 四苦를 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윤회의 고리를 끊고 그 사슬에서 벗어날 것을 추구한다. 그것이 곧 해탈(解脫)이요 그래야 비로소 극락세계에 가서 부처가 되는(成佛) 것이다.
이와 같은 윤회사상은 정업(淨業)을 닦으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는 대승불교의 정토신앙(淨土信仰)으로, 마음이 맑으면 대지가 맑아진다는 선종(禪宗)의 자성미타(自性彌陀)신앙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이란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미학으로 승화되고, "죽음이란 한 조작 뜬구름이 스러지는 것이요,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4. 힌두교
힌두교하면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종교이지만 인도라는 나라 이름이 '힌두'와 같은 어원(語源)이라는 점부터가 그의 유구한 역사를 짐작케 한다. 인더스문명과 함께 기원전 2,500년경에 발생하여 후에 바라문교와 융합하고 불교를 파생시킨 인도의 토착종교로서 4천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인도 10억 인구의 83%가 이를 신봉하고, 네팔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많은 신도를 가진 종교이다.
"마치 사람이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어 버리고 다른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이 몸속에 살고 있는 아트만도 낡은 몸뚱이를 벗어 버리고 다른 새 몸뚱이로 옮겨 가는 것이다."
"풀벌레가 풀잎 끝에 다다르면 다른 풀잎을 잡고 건너가듯이 이 아트만도 지금 머물고 있는 이 육신을 벗어 버리고 다른 육신으로 건너간다.
이와 같은 인도의 고대 경전에서 힌두교의 일관된 정신과 불교 윤회사상의 원류를 본다. 사람의 신분을 이른바 '카스트제도'라고 하는 사성계급(四姓階級)으로 나누어 철저하고도 가혹한 영구불변의 차등을 두고 있지만 그들은 비록 자기가 하층 천민계급으로 태어났더라도 그것은 전생의 업보라고 믿기에 불만 없이 이를 감수한다.
동시에 현세에서 선업을 쌓아 내세에는 상층계급으로 태어나도록 준비하고, 나아가서는 지배계급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윤회를 거듭하는 영겁(永劫) 속의 한 찰나에 불과한 것이어서 궁극적으로는 윤회의 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해탈(解脫)을 추구한다.
그러기에 삶은 삶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은 곧 잘 죽어야 한다는 말이요, 잘 죽어야 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해탈이다.
5. 기독교(基督敎)
기원전 4세기 아테네법정에서 피할 수도 있었던 처형을 스스로 자초하여 태연히 독배를 마셨던 소크라테스는 "인생이란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 안에서 옥살이하는 질곡(桎梏)이요, 죽음은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 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사"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믿었던 영혼불멸설(靈魂不滅說)이 기독교에 들어와 정통교리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11장 25. 26절)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요 이처럼 영생과 부활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다. 하나님을 믿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다가 죽으면 육신은 썩어 살아지지만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라가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시신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하나님 곁으로 보내기 위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린다. 또한 우주공간에 오직 한 분인 唯一神 여호와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신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하늘나라에서 영화를 누리고 있을 조상의 영혼을 죄 많은 세상에 초대할 이유도 없을는지 모른다.
영혼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예수가 다시 내려오는(再臨) 날, 이 세상의 모든 산자와 죽은 자는 그 앞에서 심판을 받고 결과에 따라 구원을 받는데 산자는 산대로, 죽은 자는 부활해서 들림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한다. 이것이 곧 재림이요 부활이요 휴거(携擧)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배할 때마다 "죄를 사(赦)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사도신경)하고 기도한다.
6. 이슬람교
기독교와 그 뿌리를 같이하면서도 가장 크게 갈등을 빚으며, 교리가 곧 법이요 생활규범이어서 사람의 일상생활을 극도로 불편하게 규제함에도 불구하고 중동국가들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15억의 신도를 가진 세계 3대종교의 하나가 바로 이슬람교이다.
신이 땅을 빚자 "땅의 주인은 누구냐"고 천사들이 물었다. "나를 대신하여 땅을 다스릴 자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후 蘭湧繭"고 신은 대답했다. 그리하여 하늘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땅으로 내려왔는데 천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땅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그들은 변태의 과정을 한 번 거처야 했다.
이렇게 해서 땅에 내려온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인 사람은 신의 뜻에 따라 땅에서 신이 위탁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정해진 기간의 자기임무를 마치면 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천국의 환경이 땅과 다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천국에서 내려올 때 변태했던 것처럼 그들도 천국의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변태를 해야 한다. 즉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 위한 변태의 과정이 곧 죽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나면서부터 죄가 있다고 하는 원죄설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이슬람교에서는 죄란 현세의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환경이나 사회환경에 의하여 오염되거나, 인간의 자유의지로 만들어 내는 자범죄가 있을 뿐, 원죄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비록 원죄는 없더라도 본의 아니게 오염된 때(垢)와 자기 스스로 지은 죄가 씻김을 받지 않고서는 순결무구(純潔無垢)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煉獄)과 유사한 '바르자크' 단 甕 거처야 하고, 여기에서 씻김을 받는 것이 곧 죄를 사함 받고 변태하는 과정이다. 즉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이 변태의 과정이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죽음인 것이다.
7. 맺는 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각 종교는 인간의 죽음에 각기 다른 견해와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산 자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항상 경험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이 혹은 聖者의 깨달음이라 하고, 혹은 신의 계시라 하며, 또는 영감에 의한 기록이라 하지만 이 또한 산 자가 말하는 죽은 자의 행적일 뿐, 죽은 자의 경험에 의한 죽은 자의 기록은 산 자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산 자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어차피 피상적이고 관념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믿음의 문제이고, 믿음을 전제로 하는 종교의 고유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만 적선을 해야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 하고(유교), 도(道)를 닦아야 신선이 된다 하며(도교), 이타행(利他行)을 해야 극락세계에 간다 하고(불교), 이웃을 사랑해야 천당에 간다(기독 교)고 하는 등, 각기 방편(方便)은 다르지만 그 목표는 오직 하나, 현세의 삶을 바르고, 의롭고, 착하게 살라고 하는 지고지순(至高至純)한 가르침으로 모아진다. 그래서 "모든 진리는 하나로 귀결된다.(萬法歸一)“고 하는가 보다./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