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순간

글 두레 2011. 11. 17.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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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순간

   그날 아침, 케이트와 버네사 두 자매는 함께 배에 올랐다. 그들은 두 섬 사이를 운항하는 기선 버지나아호를 타고 마닐라에서 잠비아로 가고 있었다. 앞으로 이틀이면 목적지에 가 닿을 것이다.

각자가 남편과 아이들에게서 벗어나 오랜만에 자매간의 정을 새로이 할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두 자매는 얼굴이나 체격 면에서는 매우 비슷했지만 서로의 인생관은 아주 달랐다.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마음가짐이나 복음서를 대하는 태도는 더욱 그러했다.

케이트는 이미 오래 전에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고서, 성령께서 시키시는 그대로 주저함 없이 충실히 따르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날마다 그녀는 타인에게 후히 베풀 수 있는 은총을 청하였다.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도록 자신에게 능력을 비추어 달라고 기도하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선이란 누구에게나 똑같은 형식을 띠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자비의 형태가 다를 수 있고, 따라서 남이 베푸는 모양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그녀 스스로 만족할 수 없음도 알았다. 또한 그녀는 대체로 관대한 마음을 품고는 있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고 느꼈다. 순간순간마다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로서 손색없이 대처하기 위해서는 항상 주위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그녀는 영적으로 늘 깨어 있었기에 결국 자기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견주어 보지 않아도 되는 순간은 단 한순간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리하여 그녀는 늘 주의하며 늘 준비하는, 그리고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하느님일지라도 기꺼이 맞아들이는 참된 자선을 베풀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케이트는 대개 가까운 이웃들에게서, 특히 남편과 자녀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그녀를 가로막고 나서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또한 매순간 처리해야 할 일들을 통해, 별일도 아닌데 견디기 힘든 굴욕감을 통해, 가끔씩 누구나 겪는 소소한 병치레를 통해, 그리고 아내와 어머니로서 느끼는 소박한 즐거움이나 기쁨뿐 아니라 때로는 실망감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발견하였다. 그렇다고 일부러 고생을 사서 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삶의 어려움을 참아 넘겼을 뿐이었다. 이기적인 자아에 굴복 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았다. 다른 사람들의 뜻을 온전히 받들며, 이러저러한 역할에 따르는 짐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싫증이 난다 하더라도 크고 작은 일 모두를 충실히 처리하였고, 우울한 기분에 짓눌리지도 않았다. 이렇게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선물로 내어놓고 사는 그녀가 참 행복을 맛보았음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점에서 볼 때 버네사는 언니와 거의 정반대였다. 옹졸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그녀 자신만의 제어장치가 있었다. 예를 들면 그녀는 여러 권의 성인 전을 두루 읽었는데, '기회가 생기면' - 그녀의 말마따나 - 거룩하기로 이름난 성인 성녀들의 선행을 그대로 따라 해보길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젠가는 나병한자에게 입맞추리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도 입으리라, 위대한 영적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리라는 식의 상상을 하곤 했다. 결국 그녀는 언제까지나 영광의 순간 - 하느님이 그녀의 관대한 아량을 시험하기 위해 부르실 지상 최대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가올 미래의 그 중대한 사건을 위해 힘을 비축해 놓아야 했으므로, 그녀는 꼼꼼하게 계산된 용의주도한 삶을 영위했다. 기본적으로 하느님께 불충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늘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끊임없이 저울질하곤 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소한 일들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유익, 만족을 찾았고, 자기 뜻에 따라 계획하고 선택했다. 이렇듯 사소한 일들에 매달려 하느님과 이웃에게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데 있어서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영광의 순간이 오리라 생각하면서도 혹시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속에서 살았다.

항해 첫날 저녁, 태양이 지고 바다에 온통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버지니아호에 엄청난 비극이 들이닥쳤다. 보일러실이 폭발하여 선체에 큰 구멍이 생긴 것이다. 한 시간도 못되어 배가 침몰해버릴 게 분명해졌다. 폭발소리에 신경이 곤두서있는 승객들에게 이 소식이 전해지자 배 안은 일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다른 배에 연락하여 구조받기를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구명보트가 승객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많지도 않았다. 선장은 확성기를 통해 이 사건을 사실대로 밝혔다. 결국 선장은 몇 안되는 사용 가능한 구명보트를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에게 우선 나누어 주기로 했다.

구명보트를 앞다투어 차지하려고 기를 쓰는 모습은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의 몸부림에 떠밀려 두 자매는 서로 떨어지게 되었고, 자연히 각자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버네사는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당장 공포에 질렸다.

늘 해오던 버릇대로 그녀는 무엇보다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바다에 구명보트가 내려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가장 먼저 뛰어내려 필사적으로 올라탔다. 배 위에는 아직 어린아이를 안은 대부분의 부녀자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케이트는 반대로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물론 그녀도 무척 두려웠다.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되도록 많은 아이들과 부녀자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눈앞의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혼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없는지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마지막 구명보트가 바다에 내려졌고 선원들로부터 어서 뛰어내리라는 재촉을 받았다. 바로 그 순간 케이트는 모두들 소란을 피우는 통에 구석으로 밀려난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평상시 그랬듯이 전혀 주저하지 않고 얼른 그 할머니를 구명보트에 태워드렸다. 물론 그녀는 침몰 중인 배에 그대로 머물렀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 바다 한복판에서 갈팡질팡하는 와중에 영광의 순간은 다가왔다.

눈부신 광채를 발하며 하늘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두 자매는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늘상 그 영광의 순간을 위해 힘을 아껴두었던 버네사가 그 순간을 분간하지 못했으니 무엇보다 안 된 일이었다.

반면, 언제나 자기 자신을 이웃사람들에게 아낌없어 내어주던 케이트는 그 영광의 순간을 가장 아름답게 빛냈다. 그녀는 감히 영광의 순간을 생각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았으나, 영광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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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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