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때가 사월 어느 봄날이었지
배꽃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고
보리밭 제 성질만큼 푸를 때였으니까
저녁식사 시간 맞춰 해남으로 가는 길
길목은 석양이 앞장을 섰는데
장(場) 펼친 물목(物目)의 향연이
언뜻언뜻 반겼지
성전 지나 계곡면 길에 접어들자
향긋한 묵향(墨香)이 두 손을 맞잡아주고
질펀한 시심(詩心)의 노래가
소매 속을 들썩이더군
마산면 푯말 보고 절로 미소 지었는데
홍 박사 어찌 알고 힐끔 눈빛 주더군
해남 길 저도 모르게 시흥(詩興)이
강물 되는 길
/최한선
'땅끝' 너머 동경을 건드리는 남도의 끝이자 시작인 해남 고을. 녹우당(윤선도 고택)과 남도 특유의 풍광에 맛집 손짓도 각별하다. 지금은 보리밭이 한창 '푸를 때', '물목(物目)의 향연'으로 분주하겠다. 길목마다 저만의 봄을 얼마나 환히 펼치고 있을까.
'저도 모르게 시흥이 강물 되는 길'. 꽃구름 사이사이 푸른 보리 물결에 눈 맛도 더할 나위 없으리. '힐끔' 눈빛과 봄빛에 깊이 취할 즈음, 어디서 남도 소리 한 자락이 흘러나올지도! 잘 삭힌 그 소리 그늘 속으로 하루쯤 그냥 마냥 기울어도 좋을….// 정수자 시조시인/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