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樓一嘯攬蓬壺 (고루일소남봉호)
높은 누각에서 휘파람 불고 선산을 바라보니
天備看山別作區 (천비간산별작구)
산을 구경하라 하늘이 만든 특별한 자리로구나.
無數飛騰渾欲怒 (무수비등혼욕노)
봉우리들 수도 없이 날고 뛰며 벌컥 화를 내다가
有時尖碎不勝孤 (유시첨쇄불승고)
때로는 뾰쪽하고 자잘해져 못 견디게 외로워하네.
夕陽到頂光難定 (석양도정광난정)
석양은 정상에 이르러서 어지럽게 부서지고
淺雪粘 喚態各殊 (천설점환태각수)
잔설은 꼭지에 달라붙어 천태만상 제각각일세.
香縷蒲團吟弄穩 (향루포단음농온)
향 사르고 부들자리에서 편안히 읊조리면서
謝公登陟笑全愚 (사공등척소전우)
힘겹게 산을 오른 바보 같은 사영운을 비웃네.
*사영운(謝靈運)은 명산 유람을 즐긴 중국의 시인.
정조 때의 정승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 1799)이 1749년 30세 때 지었다. 금강산의 비경을 조망하라고 하늘이 만들어준 최적의 명소가 헐성루다. 쉬고 깨어 있는 자의 자리란 헐성루에 앉아보니 수많은 산봉우리 모두가 크게 화를 내는 듯이 기세당당하다. 그중에서 뾰족하고 작은 외톨이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산 정상은 석양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을 반사하고, 잔설이 달라붙어 기묘하다. 금강산을 노래한 명작으로 특히, 3구와 4구가 유명하다. 마음껏 권세를 휘두르다가 세력을 잃은 권력자의 처절한 외로움을 은유한 때문이다. 깨어 있는 자의 자리에서 보면 정상에 올라 있는 자들의 망가진 뒤끝이 잘도 보인다.//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