豪氣凌雲處(호기능운처) 호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야
那知天地寬(나지천지관) 천지가 넓은 줄 알 수나 있었겠나!
病難投我筆(병난투아필) 병들어도 내 붓을 던지기는 어렵고
老不掛吾冠(노불괘오관) 늙어도 관모를 못 벗어던지겠네.
秋與鄕情動(추여향정동) 가을은 고향 생각을 데리고 찾아오고
夜從廚語闌(야종주어란) 밤은 부엌의 말소리를 따라 깊어가네.
焚香如降格(분향여강격) 향 사르자 신명이 강림하신 모양이니
妻子願團欒(처자원단란) 처자식과 단란하게 살도록 살펴주소서.
고려 말의 문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1380년 8월 15일 추석에 썼다. 365일 수많은 날의 하루 8월 15일이 되었다. 하지만 365분의 1이 아닌 아주 특별한 날이다. 특별한 날이라 그런지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젊은 시절 능력과 패기를 믿고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천방지축 살아왔지만 쉰 살을 넘기고 보니 몸은 늙고 병이 들었다. 그렇다고 붓을 던지거나 벼슬자리를 호기롭게 팽개치고 한가롭게 요양이나 할 처지가 못 된다. 오늘은 추석, 가을은 언제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다가오고, 부엌에서 음식 차리며 식구들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 밤은 깊어간다. 제사를 올리고 나자 조상의 신령이 강림하여 찾아온 느낌이 든다. 다른 소망은 없다. 처자식과 함께 단란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만족이니 신령들께서는 보살펴주셨으면 좋겠다.//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