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대신 요리사 된 뉴요커
오랜만에 가슴이 뛰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의사대신 뉴욕에서 한국 요리사가 된 김훈씨. 오늘 뉴욕에 “단지” 맛 한번 보러 놀러 가볼까 합니다.
“어머니, 저는 요리사가 되고 싶습니다. 의대는 그만두겠습니다.” 외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던 어머니는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두 살 때부터 혼자 힘으로 키운 아들, 미국 의학전문대학원에 잘 다니던 아들이 졸업 1년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둔다니. 그것도 요리사가 되겠다고 의사의 길을 포기하다니. 어머니는 반대했다. “안 된다. 실수하는 거야. 남자에게 요리는 취미일 뿐이다.” 소용없었다. 아들은 어머니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의대에 자퇴서를 낸 아들은 곧바로 뉴욕의 요리학교(ICC·)에 등록했다. 의사의 흰 가운 대신 흰 조리복을 입고, 수술칼 대신 식칼을 들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그 후 1년간 대화를 하지 않았다.
뉴욕 맨해튼의 최고급 레스토랑 ‘다니엘’의 인턴을 마치고 정식 채용돼 2년간 일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손님으로 찾아오셨다. 다니엘은 워낙 정중한 서비스로 이름 높은 식당이지만, 직원 가족에게는 유달리 극진하다. 완벽한 음식과 서비스를 받으셨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네가 요리를 좀 하는가 보구나." 어머니가 자신의 방식대로 은근하게 허락하신 셈이었다. 칭찬이기도 하고. 요리를 시작한 이후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그 아들, 요리사 김훈이(42·미국 이름 후니 김)씨가 시작한 뉴욕 52번가 한식당 ‘단지’(Danji)는 2011년 10월 미식계의 ‘성서’로 불리는 레스토랑 평가서 미슐랭 가이드의 별 하나를 받았다. 한식당으로선 최초의 별이었다. 화려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프랑스 식당, 고고한 간판을 내세운 일식당이 즐비한 미식의 도시 뉴욕에서 그는 한국식 그대로의 된장찌개와 은대구 조림으로 뉴요커를 사로잡았다.
김씨는 2012년 12월 26번가에 ‘단지’의 형제 격인 주막 ‘한잔(Hanjan)’을 열었다. 한국 술집에서 흔히 보는 50세주와 짜장라면이 나온다. 단지와 한잔에서 먹을 수 있는 한식은 한국인이 먹어보면 어제 밥상에서 먹은 반찬이고, 그저께 회사 앞 주점에서 먹은 안주다. 그 맛에 뉴욕 유명인사들이 반했다. 영화배우 나탈리 포트먼은 단지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딸인 첼시 클린턴은 한잔에서 한식을 즐겼다.
국내 특1급 호텔 한식당 중 가장 오래된 ‘무궁화’(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단지와 한잔의 요리를 선보이기 위해 한국을 찾은 김씨를 지난 27일 만났다. 2011년 그의 식당 단지가 미슐랭의 별을 받았을 때 그는 ‘후니 김(Hooni Kim)’이란 이름으로 국내에 알려졌다. 인터뷰 직전 그는 “제 이름을 꼭 김훈이라고 제대로 적어주세요” 라고 부탁했다. 의외였다. 원래 한국 이름은 놔두고 일부러 외국 이름을 만들어 붙이는 요리사가 많지 않던가.
― 굳이 이름을 김훈이로 해달라고 했는데.-
“한국 사람이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인천공항에 내리면 고향에 온 기분이다. 미국에서는 못 쓰던 한국어를 마음껏 쓰고, 한국 음식을 신나게 먹으면서 한국 사람이라는 걸 실감한다.”
― 원래는 의사가 되려고 했던 것 아닌가?-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고에 진학했고, 캘리포니아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의사가 되어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다. 코네티컷대 메디컬스쿨 4년 과정 중 3년 과정까지 배우고 그만뒀다. 병원에서 일해보니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생각보다 많았다. 보험회사가 끼면 문제가 많았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보험이 없어 못하는 환자, 죽게 내버려두는 게 보험회사에 이득이 된다고 수술이 지체되는 환자 등을 보면서 무력함을 느꼈다. 어쩌면 남을 돕는 것보다 즐겁게 해주는 게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 의대 졸업 1년 앞두고 진로를 요리사로 급작스럽게 변경한 이유는?-
“나를 요리사로 만든 건 요리 못 하는 어머니다. 패션 디자이너이신데 요리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변호사인 아내는 어머니보다 요리를 더 못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면 부지런히 식당을 돌아다녀야 했다. 덕분에 맛에 대한 감각이 일찌감치 발달했다. 그러다가 내 손으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잠시 요리 학원에 다니다 완전히 빠져들게 됐다.”
부친은 선장이었다. 항해 도중 갑자기 덮친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두 살 때였다. 어머니를 따라 3세 때 영국으로 갔다가 10세 때 건너간 뉴욕에서 지금까지 산다. 어릴 때도 일 년에 한두 번은 반드시 한국을 찾았다. 소안도에 살던 할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몹시 보고 싶어 했다. 그에게 소안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 땅’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려서, 외가인 광주까지 다시 비행기를 타고,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완도에 가서, 완도에서 페리를 타고 소안도 근처로 가서, 마중 나온 통통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서, 다시 차를 타고 할머니 집으로 갔다. 참 멀기도 멀더라.” 길고 멀고 힘들지만 반드시 찾아가야 하는 곳. 한국은 그에게 그런 고향이었다. 한식당을 여는 것이 길고 멀고 힘들지만 반드시 하고 싶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의대를 그만둔 그는 ICC 과정을 마치고, 무보수 인턴 지원자만 수백 명에 이른다는 뉴욕 최고급 레스토랑 ‘다니엘’의 인턴과 정식 직원으로 일했다. 저녁 식사가 1인당 500달러에 이르는 일식당 ‘마사’가 그 다음 직장이었다. ‘내 식당을 열겠다.’는 생각에 마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소수 예약 고객에게 주문 음식을 차려주는 ‘실험’도 해봤다. “내 인생을 건 도전이었다.”는 단지는 이런 과정을 거친 후 태어났다.
― 미국에서 살며 서양 요리를 배웠는데 어떻게 한식당을 할 생각을 했나.-
“요리사는 자신다운 요리를 할 때 빛이 난다. 맛부터 접시에 담는 모양새까지 ‘아무개답다’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다. ‘김훈이다운’ 음식은 한식이다. 저는 한국에서 살지 않았고, 한국말이 부족하지만, 제 안은 된장과 김치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걸그룹을 좋아하는 한국 아저씨다.”
― 뉴욕에서 뉴요커를 상대로 한식당을 여는 도전을 하다니 두려웠겠다.-
“‘다니엘’과 일식당 ‘마사’에서 일하며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재료는 다 만져봤다.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았다. 계속 다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리사로서 성장하려면 누구 밑에서 누구의 요리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두려운 거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너무 바빠서 두려움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16시간 동안 서서 요리하고, 다른 요리사들을 가르치고, 손님 접대를 했다. 고통은 밤에 자려고 침대에 누운 순간 잠깐 느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곧바로 졸음이 쏟아졌다.”
― 뉴욕에서 식당을 내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오바마 정부가 실시하던 소규모 사업체 지원 대출 제도의 덕을 봤다. 리먼 사태(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사람이 없던 무렵에 내놓은 지원책이었다. 자본금과 동일한 규모의 대출이 가능했다. 아내와 함께 모은 돈에 대출금을 보태 가까스로 시작했다. 50만달러 정도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2배 이상 줘도 어려울 것이다.”
― 치즈나 버터 대신 고추장과 된장을 넣은 한식을 만들어 미국인들이 좋아하게 만드는 것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음식에 한식 재료를 넣어 부담감을 줄였다. 미국인이 즐겨 먹는 슬라이더(작은 햄버거 빵)에 불고기와 제육볶음을 넣는 식이다. 보기에는 익숙한데, 먹어보면 완전히 색다른 맛으로 놀라움을 주는 것이다.”
― 단지에서는 한국적인 한식이 나오는데, 재료는 전부 공수해서 쓰나?-
“고춧가루, 고추장, 간장, 참기름, 된장 등 5가지는 반드시 한국에서 가져다 쓴다. 부추나 당근 등 야채는 현지산을 쓴다.”
―하루 손님은 어느 정도인가?-
“36석 단지는 150~200명, 50석 한잔은 170~230명 정도로 꾸준하다.”
― 뉴욕은 최고의 미식 도시다. 요리사들끼리 경쟁이 심할 텐데.-
“뉴욕 미식가들은 냉정하기도 하지만 매우 열정적이다. 맛있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찾아온다. 경쟁 스트레스보다 발전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더 심하다. 그래서 한잔도 새로 열고, 한국에도 자주 와서 맛을 본다.”
― 단지와 한잔이 성공한 비결이 뭐라고 보나?-
“제 철학을 철저히 고수했다. 메뉴판의 모든 요리가 다 맛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소한 한식을 소개하는 과정은 신뢰를 쌓는 과정이다. 처음 온 손님은 메뉴판만 보고 주문한다. 시험 삼아 시켰는데 맛이 있으면 저를 믿게 된다. 50가지 메뉴를 내놓고 40가지만 맛있어도 성공이라고 하는 식당이 있는데, 맛없는 메뉴를 시켜서 실망한 손님은 새 메뉴를 절대 주문하지 않게 된다. 손님이 식당에서 끊임없이 탐험하게 만들어야 성공한다.”
― 홍보전도 치열하다고들 하던데.-
“단지와 한잔은 홍보를 안 한 게 성공의 요인인 것도 같다. 홍보를 하면 처음에는 손님이 많이 온다. 그러나 홍보를 따라온 손님은 우리 식당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뜨는 식당이라 오는 거다. 처음에야 돈도 벌고 손님도 꽉 차겠지 그러나 유행 따라오는 손님으로 꽉 차면, 진정으로 식당을 좋아하고 계속 찾아줄 동네 미식가 손님들이 못 온다. 몇 달 후 유행 손님들이 새로 뜬 식당을 찾아서 썰물처럼 떠나면 식당이 텅텅 빈다. 그때는 동네 미식가들을 이미 잃은 후다. 정말 좋아서 찾아줄 손님을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로잡아야 오래갈 수 있다.”
― ’다니엘’ 출신 요리사들이 활발하게 활약한다. 주방 문화가 다른가?-
“뉴욕 최고급 식당은 좌석이 대개 50석 정도다. 다니엘은 140석이다. 그런데 일하는 요리사는 10~12명 정도로 같다. 하루 저녁에 두 번 손님이 바뀌면 300명분을 10명이 만든다. 보통 일요일은 쉬는데, 일요일에 결혼피로연이라도 잡히면 2주간 하루도 못 쉬고 매일 16시간씩 서서 미치도록 요리를 만든다. 그것도 평범하게 가 아니라 완벽하게....그렇게 훈련이 된 요리사들에게는 평소에든 비상 상황에서든 요리를 믿고 맡길 수 있다.”
― 그처럼 ‘미칠 듯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이기나?-
“마라토너들이 경험한다는 극치감, ‘러너즈 하이(runner’s high)’와 비슷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공포가 몰려온다. 어떻게 오늘을 버티나 싶다. 주방에 들어가 예약 리스트를 보면 300명이 넘는다. 이 밤을 과연 넘길 수 있을까 싶다. 그런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내고, 그날 요리를 마칠 때 그때 마약 같은 아드레날린이 쏟아진다. 그걸로 버틴다.”
― 요리의 영감은 어디서 얻나?-
“좋은 요리사가 되려면 많이 먹어보고, 머릿속에 맛의 프로필을 빼곡히 채워야 한다. 그걸 수시로 꺼내 조합해보는 것이다. 날이 덥다고 치자. 식초를 넣은 매콤한 요리가 떠오른다. 그 맛을 가진 음식을 찾아 기억의 저장고를 뒤진다. 골뱅이 무침 당첨. 그러면 이리저리 만들어보면서 조리법을 개발한다.”
― 단지가 2011년 이후 2년째 받았던 미슐랭 별을 올해 잃었다. 수긍하나?-
“딱 30분 동안 속상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에만 집중해야 하는데 한잔을 새로 시작했고, 한식 개발을 위해 한국에 3개월간 머물렀다. 표가 난 것이다.”
― 별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자살한 요리사도 있다는데.-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사람 성격인 것 같다. 처음 별을 받았을 때 축하 파티도 안 했다. 워낙 바빠서 틈이 없었다. 별을 받은 건 기쁘고 감사하다. 하지만 지금 내 한식을 더 배우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미래의 손님을 다 잃게 된다. 그건 별을 잃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다. 뉴욕에서 한식당을 꾸준히 오래 운영하려면, 한국에 와서 직접 맛을 봐야 한다. 그래서 단지에만 집중하지 않고 영역을 넓히려는 것이다.”
― 미슐랭 별을 받는 요리사는 무엇이 다른가?-
“요리사에는 두 부류가 있다. 마음에 안 드는데도 시간 됐다고 손님에게 음식을 내보내는 요리사와 아무리 손님에게 혼날 것 같아도 자기가 만족하지 않으면 절대 안 보내는 요리사다. 재료비 생각하고, 욕먹을 생각을 하면, 방금 만든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기는 어렵다. 미슐랭 요리사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버린다. 맛없는 걸 보내면 그 손님은 다시 안 온다. 모르고 실수해서 잃는 손님도 많은데 알면서 손님을 잃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단지가 별을 얻고 잃으면서 깨닫게 된 점이 있다면?-
“요리에는 ‘마스터(master·완성)’가 없다는 것이다. 다니엘과 마사에서 일할 때만 해도 요리에 자신이 있었다. 알 거 다 아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국 지방 음식을 돌아다니며 먹어보니 한식의 세계가 끝이 없었다. 한식은 저를 요리사로 다시 살게 해 줬다.”
―한국에 레스토랑을 낼 계획이 있나?-
“그건 제가 할 일이 아니다. 제 음식은 한국분들은 뻔히 다 아는 음식이다. 저의 일은 한국에서 많이 먹어보고 그 맛을 미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 일부에서는 단지의 요리가 한인타운 한식에 비해 지나치게 비싸다고 하는데.-
“뉴욕에서 인정받는 일식은 합리적인 가격에서부터 1인당 500달러 최고가까지 다양하다. 한식도 ‘싸야 한다’는 생각을 깨야 대접받을 수 있다. 뉴욕의 미식가들은 싸다고 좋아하지 않는다. 좋은 재료를 쓰고 제값을 받으면 된다. 단지는 떡볶이에도 최상의 재료를 쓴다. 기존 뉴욕 한식당 재료보다 3배 정도 비싼 것이다. ‘싸고 푸짐하게 먹으려면 한인타운에 가야 한다.’고 하는 교포 분들이 있더라. 엄청나게 화가 난다. 한 나라 문화 중 가장 큰 부분이 음식인데, 저렴함을 문화의 장점으로 내세우다니 답답하다. 좋은 재료 써서 맛있게 만들어내고, 그에 맞는 가격을 받는 게 맞지 않나.”
― 한식 세계화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보나?-
“정말로 세계화됐다고 하려면 한식을 먹겠다고 한국까지 비행기 타고 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일본이나 스페인으로는 맛 관광을 가지 않나. 일부러 그 나라를 찾아가는 것은 돈 문제 이전에 존경의 표시다. 정통을 알고 느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돼야 한다. 그럴 가능성이 이미 보인다. 제가 아는 뉴욕의 유명한 요리사 중에도 한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재료가 뻔하지 않으니까. 이탈리아나 프랑스식에 들어가는 재료는 뻔하다. 일본 재료야 전부 미국으로 수입되고 한국 것은 안 간다. 신비한 비밀을 간직한 재료는 어떤 요리사든 빠져들게 돼 있다.”
― 한식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강하고 깊은맛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된장이 그렇다. 한잔에서 가장 잘 팔리는 것이 쌈장이다. 원래 팔지 않다가 달라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내놓게 됐다. 된장에 사과즙, 호두, 마늘, 참기름, 청국장을 섞는다. 서양인들은 최고의 유기농 드레싱이라고 좋아한다. 야채의 단맛을 올려주면서 건강도 챙겨주니까.”
― 미슐랭 별 두 개를 받은 임정식씨의 뉴욕 레스토랑 ‘정식(Jungsik)’에 가본 적이 있나?-
“가보니 임정식씨가 보였다. 잘하는 식당은 그 식당 요리사가 어떤 사람인지 보이는 곳이다. 임정식씨는 한국에서 자랐지만, 서양식 정찬에 능하다. 정식에서는 그게 보인다. 저는 반대로 미국에서 자랐지만 소박한 한식이 더 좋다. 한잔은 화장실 벽보까지 신경 썼다. 어렸을 때 한국 와서 본 ‘로보트 태권브이’와 ‘엄마 찾아 삼만 리’ 포스터를 붙여 놨다. 각자 자신다운 식당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메일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