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인왕산도, 인왕제색도, 백운동도, 풍계임류도, 청송당동, 청풍계도, 장동춘색도, 장동팔경화첩(8면), 인곡유거도, 수성구지도, 필운대도,
서울근교
경복궁도, 세검정도, 동소문도, 동문조도도, 서교찬의도, 목멱산도, 부자묘노회도, 북단송음도, 압구정도, 장안연우도, 사송도, 사직송도, 노송도, 노송영지도, 송석도, 송선도, 송학도, 연연견남산도, 함흥본궁송도, 노백도, 직절당도
그외 진경산수화로는 영남 지방의 명승과 고적을 58곳을 그린 교남명승첩과 해인사도, 연강임술첩, 임진적벽도, 연광정도, 구담도, 계상정거도, 삼부연도, 등이 있습니다.
겸재의 한양진경 감상
仁谷精舍 / 인왕산 아래 있던 겸재 정선의 집
淸風溪 2
원래 청풍계는 “푸른 단풍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으로 불리웠으나, 후에는 “푸른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뜻으로도 전해졌습니다. 그 의미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그 곳에는 정선의 스승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선은 소나무, 버드나무, 느티나무 등이 가득한 이 계곡에 대한 감상을 따뜻하면서도 웅장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서울은 풍수지리학에서 말하는 명당의 조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춘 천하으뜸의 명당이다.
삼각산이 조산이고, 백악산이 현무가 되며, 낙산이 청룡, 인왕산이 백호, 남산이 주작이 되어 거대한 비단 주머니꼴을 하고 있다.
거기에 동쪽의 안암산, 서쪽의 안산, 남쪽의 관악산이 한겹 둘러싸서 겹주머니 형태를 하고 있으니 천연의 요새라 할 만하다. 물길은 한반도에서 제일 큰 강인 한강이 동북쪽에서 흘러와 서울의 남쪽을 휘감아 돌며 서북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천연의 해자가 동, 남, 서를 에워 싼 형국이다.
이런 지리적 요건을 갖추기도 쉽지 않은데, 삼각산으로 내려 온 산맥 전체가 백색 화강암으로 백운산, 인왕산, 낙산이 모두 한 덩이 거대한 흰 빛 바위인듯 솟구쳐 있다. 그러니 그 사이 사이에 펼쳐진 계곡은 기임절벽과 맑고 깨끗한 물 그리고 솔숲 등 수목이 어우러지면서 그 아름다움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산줄기와 시냇물들이 3면을 휘감아 나가는 한강과 마주치면서 갖가지 낭떠러지와 산등성이, 모래벌판, 모래섬 등을 만들어 냈다. 이에 한양 서울의 강산풍경은 천하 제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겸재 정선은 자신이 나고 자라 평생을 살던 터전인 백악산과 인왕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양 서울 곳곳을 문화유적과 함께 진경으로 사생해 남겨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서울을 3면으로 둘러싸면서 산과 시내를 만나 절경을 이루고 수많은 문화유적을 담아 낸 한강변의 명승지도양수리 부근에서부터 행주에 이르기까지(1676~1759)배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진경산수화로 사생해 남겼다. 최완수/겸재의 한양진경 중에서
겸재 정선 국보급 그림 21점 돌아왔다. [중앙일보 송의호.박지영] 겸재 화첩 그림 21점의 여정은 드라마틱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의 작품 수십 점이 독일 땅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유준영(전 이화여대 미대 교수)씨였다.
1974년 독일에서 유학하던 유씨는 당시 성오틸리엔 수도원장인 노베르트 베버의 저서인
'금강산 여행기'를 읽다 베버가 갖고 있다는 겸재 그림 사진 석 장을 접했다. 그는 무작정 오틸리엔수도원으로 달려갔다. 선교 문물을 전시해 놓은 수도원 내 박물관 한 켠에서 한국의 고무신. 곰방대와 나란히 놓여 있는 겸재의 화첩을 발견했다. ㅡ
유씨는 "이국 땅에서 조선시대 최고 화가의 작품을 봤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박물관 측의 양해를 얻어 작품 사진을 찍는 등 기록으로 남겼다"고 말했다. 유씨는 이를 바탕으로 '독일에 있는 겸재의 회화, 오틸리엔수도원에 있는 수장 화첩의 첫 공개'(77년)라는 글로 화첩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유씨의 연구에 따르면 겸재의 그림은 베버 원장이 독일로 돌아갈 때 함께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25년 한국에 가톨릭 교구를 시찰하러 온 베버 원장은 금강산 여행 길에 지인들이 구입한 겸재 그림 21점을 선물로 받았고, 이후 오틸리엔수도원에 기증했다.
그림은 수도원의 작은 박물관에 전시됐다. 본래는 하나씩 분리돼 있었으나 독일에서 화첩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오틸리엔수도원을 방문한 한국인들이 수도원 관계자에게 "한국의 국보급 문화재"라며 "저렇게 둘 물건이 아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전해진다.
수도원 측은 그 이후 허술한 보안을 우려해 겸재 화첩을 박물관 캐비닛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왜관 성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선지훈 신부는 그 무렵 7년간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수행 생활을 하게 된다. 왜관수도원과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은 본부와 지부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수행자를 교환하는 등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는 오틸리엔이 소장한 방대한 한국 관련 필름 자료와 문화재 등을 접한 뒤 한국으로 가져갈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회가 왔다. 그가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수행할 당시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이던 예레미야스 슈뢰더가 오틸리엔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된 것이다.
수도원 관계자는 "선 신부는 2009년이면 오틸리엔수도원이 한국에 진출한 지 100년이 되는 특별한 해임을 강조하며 특별 행사로 한국문화재의 반환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선 신부는 "설득 과정이 참으로 힘들어 때로는 압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며 "해외에 반출된 문화재를 의미 있게 반환한 선례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오틸리엔수도원 관계자는 "반환을 결정한 직접적 계기는 미술품 경매업체인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화첩에 눈독을 들이고 팔 것을 여러 차례 집요하게 권유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아무리 가격을 올려도 경매업체에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거부했다는 것. 이후 수도원에선 오히려 "한국인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를 이 기회에 돌려 주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한다. 크리스티경매 측은 화첩에 50억원이란 가상 경매가를 매기기도 했다고 한다.
◆ 오틸리엔수도원과 한국의 인연=한국에서 베네딕도회는 1909년 독일 베네딕도회 오틸리엔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서울에 파견되면서 시작됐다. 27년에는 당시 교회의 필요성 때문에 수도원을 원산 지역 덕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34년에는 중국 옌지에도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전후해 모두 폐쇄됐다. 52년 뿔뿔이 흩어진 수도자들이 다시 모여 베네딕도회 수도회 생활을 시작한 곳이 지금의 왜관수도원이다.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원이기도 하다. 대구=송의호 기자, 서울=박지영 기자
겸재 정선의 ‘야수소서’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선비는 중국 진나라의 병법가 황석공이며 동자는 장량이다. 겸재는 중국 고사를 바탕으로 인물화를 그렸지만 인물의 얼굴이나 배경의 나무 등은 한국적 양식으로 표현했다
독일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던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의 21점을 합친 화첩이 영구임대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사진은 수록작품 중 함흥본궁송(咸興本宮松)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사진은 수록작품 중 부자묘노회(夫子廟老檜)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사진은 수록작품 중 낙조장류(落照藏柳)라는 제목이 붙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