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 그늘
혜화동 그 집의 감들은
붉게 물들어가고 있겠지
메르스니 수십 년래 가뭄이니 생뚱맞은 역사책 따위들이
때 아닌 군화를 신고 저벅저벅 짓밟고 가도
혜화동 감나무는 여전히
주렁주렁 오누이 감 알을 품고 있겠지
푸릇푸릇한 마음들이
잃어버린 것과 소중한 것들을 찾아 하나둘
모여들던 그곳
봄날에는 뜨락의 늙은 나무도 속살 감꽃을
부끄러이 숨죽여 터트리고
우리 작고 착한 영혼들은 서툰 사랑과 진실을 엮어
작은 스카프 같은 시(詩)를 빚어내곤 했었지
시린 마음끼리 어깨동무를 하고
때로는 사랑의 향내가 설핏 스쳐가기도 하던
멀어진 별과 잊혀진 꿈과 작은 술잔이 함께 자리한
그 시절 오십 령(嶺)마루턱에서 만난 암자(庵子) 그 집
하늘과 땅이 잘 어울리는
혜화동 골목 어귀의 대문이 커다란 그 집에는
맑은 햇살 붉은 감이 이제
한껏 무르익고 있겠지
205.11.
/송남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