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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출악성 (不出惡聲)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윤광석(尹光碩)은 이웃 고을 함양 군수였다. 자주 왕래하며 친하게 지냈다. 윤광석이 선대의 문집을 간행하면서 연암의 선조를 잘못된 사실로 모독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뒤늦게 이 일을 안 연암의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윤광석은 자기가 직접 한 일이 아니며, 미처 살피지 못해 일어난 일이니 당장 판을 헐어 새로 찍겠다고 연암에게 사과했다. 막상 딴 데 가서는, 내용이 좋다고 연암이 칭찬까지 해놓고 이제 와서 저런다며 힐난했다. 윤광석은 한술 더 떠 지금도 둘 사이가 전처럼 좋고 술자리에서 단란한 정을 나누며 지낸다며 떠들고 다녔다.

 

연암은 부들부들 치를 떨었다. 붓을 들어 윤광석에게 긴 편지를 썼다. 전후 경과를 적시하고 분노를 꾹꾹 누른 채 이렇게 편지를 맺었다. "이후 다시는 상정(常情)을 벗어난 말로 꾸미려 들지 말고, 분분한 입씨름을 끊읍시다. 나는 그대에게 원한이 이미 깊고, 사귐은 끊어지고 말았소. 그런데도 속마음을 피력하는 것은 '군자는 절교해도 나쁜 소리를 내지 않는다(君子絶交, 不出惡聲)'는 뜻을 따르려 함이오."

 

끝 구절은 '전국책(戰國策)'에 나온다. 연나라 소왕(昭王)을 도와 제나라의 70여 성을 빼앗은 악의(樂毅)가 제나라의 반간계로 모함을 받아 그 아들 혜왕(惠王)에게 소환당했다. 악의는 조나라로 망명해 달아났다. 혜왕은 결국 제나라에 크게 패해 빼앗은 땅을 도로 내주었다. 악의가 그 틈을 타 보복할까 두려워 혜왕은 편지를 보내 죄를 따졌다.

 

악의는 공손하게 자기의 부덕을 사죄하고 "옛날의 군자는 사귐을 끊을 때 나쁜 소리를 내지 않고, 충신이 나라를 떠날 때는 그 이름을 깨끗이 하지 않는다(不潔其名)고 들었다"며 편지를 끝맺었다. 지난 일은 원망하지 않겠다. 허물은 내가 안고 간다. 등에다 칼을 꽂는 일도 하지 않겠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는 대답이었다.

 

그러고도 잘 되나 보자. 나인가 저 사람인가. 양단간에 선택을 해라. 대체 내 허물은 하나도 없고, 상대를 힐난하고 나무라는 말뿐이다. 벗 사이에, 상하 관계에서 오갈 말이 아니다. 머금어 가만히 누르지 않고 속사포로 제 말만 쏟아낸다. 악의나 연암이나 할 말이 왜 없었겠는가? 참았던 것뿐이지.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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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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