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의 능금
봄비가 다녀간 담장밑 양지쪽에
어느날 딸아이가 능금씨 심는다
봄이 다 가고 여름이 와도
싹은 나지 않고 가슴 죄는데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와서
까마득 그 일 다 잊어버릴 때
딸아이 마음 속에 능금꽃 필까
딸아이 마음 속에 능금이 열릴까
딸아이에게
퇴비 한 줌 주지 못한
어른이 송구스럽다 /김만옥(1946~1975)
착하고 예쁜 아이가 한 알 능금의 씨앗을 심는다. 그리고 부드러운 흙을 이불처럼 덮어 준다. 때마침 봄비도 다녀갔다. 아이는 능금씨가 눈을 떠 싹이 나고 가지를 뻗고 능금이 열리고 붉게 익기를 빈다. 아이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아침마다 능금씨 묻은 담장 아래에 가보았겠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어도 도통 싹이 나지 않았으니 아이는 또 얼마나 실망하여 맥이 풀렸을까.
시간이 오래되어 아이가 능금씨를 심은 일조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질 무렵 시인은 문득 묻는다. 아이의 마음에 심은 꿈이라는 능금씨가 꽃 피고 열매를 열었는지를. 그리고 딸아이의 소망이 이뤄지는 일에 어른으로서 작은 보탬도 주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 매일 매일의 밤을 능금씨처럼 웅크려 잠들었을 아이여, 미안하다.// 문태준 시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