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이 나를 불러
이제야 도착했어요
가벼워진 생애 앞서
허방에게 절을 하고
침묵은 영문도 모른 채
편육 몇 점 내주네요
핏물 빠진 살 씹으며
붉음을 생각해요
당신도 저 핏기 없는
세월을 건넜을까
그래도 물방울 무덤은
부패하지 않겠죠
이빨에 낀 허기를
깊숙이 찔렀어요
묻어나온 혈흔을
혀끝으로 닦아낼 때
고적한 슬픔의 문장,
부고에 가라앉네요 /권성훈
올해도 슬픔이 많은 한 해였다고, 돌아보니 늘 그렇지 않았나 싶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슬픔도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 어느 죽음에 대한 예의로 찾아간 곳에서 맞닥뜨린 슬픔만이 아니다. 도처에 힘든 사람이 늘고 아픈 삶이 많아지면서 '슬픔의 문장'도 자주 만나곤 한다.
'부고' 또한 '술잔이 나를 불러'내듯 느닷없이 닥치는 부름의 형식. 그럴 때 둘러앉아 주억주억 씹는 '핏물 빠진 살'은 저세상으로 간 사람의 살빛과 겹친다. 누구는 가고 누구는 남아 또 다른 남의 살점을 씹는 세상사. 고인이 '핏기 없는 세월을 건'너갔듯 우리도 때가 되면 가려니, 슬픔의 문장을 빌려 한때를 견딘다. '묻어나온 혈흔을 혀끝으로 닦아'내듯, 석양이 능선을 붉히다 닦아내다 또 넘어가듯.// 정수자 시조시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