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속 낡은 물건을 정리하는데 해묵은 글씨 하나가 나온다. '한운불우(閑雲不雨)'란 네 글자가 적혀 있다. 빈 하늘을 떠도는 한가로운 구름은 결코 비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은 비가 되어 내려와 지상의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때 그 소임을 마친다. 게을리 놀기만 하면 보람을 거둘 날이 없다는 뜻일까? 구름이 비가 되어 내리려면 왕성한 기운이 한데 모여 걷잡을 수 없이 흘러넘쳐야 한다. 쉬엄쉬엄 느릿느릿 배를 깔고 떠가는 구름은 보기에는 여유로워도 산 중턱에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만다.
송나라 육유(陸游·1125~1210)의 '유교만조(柳橋晩眺)'란 시에 이 구절이 나온다. 시는 이렇다. "작은 물가 고기 뛰는 소리 들리고, 누운 숲서 학 오기를 기다리노라. 한가한 구름은 비가 못 되어, 푸른 산 주변서 흩날리누나(小浦聞魚躍, 橫林待鶴歸. 閑雲不成雨, 故傍碧山飛)." 버드나무를 배경에 세운 다리 위에서 저물녘 경물을 바라보며 쓴 시다. 해가 뉘엿해 고즈넉한데 이따금 고기가 물 위로 뛰어오른다. 길게 누운 숲의 실루엣에 눈길을 주려니 비를 만들지 못한 심심한 구름이 산허리를 기웃대다 제 풀에 흩어진다.
시인은 비를 못 만든 채 흩어지고 마는 구름에다 자신의 신세를 투영했다. 젊어 장한 뜻을 품었으되 이룬 것 없는 빈손뿐이다. 피어나던 꿈, 솟구치던 기상은 어디 갔나. 특별히 안타깝기보다는 약간의 아쉬움을 머금은 관조(觀照)에 가깝다.
기대승(奇大升·1527~1572)은 노진(盧稹)을 전송하며 지어준 '하늘 가 구름[天際雲]'이란 시의 첫머리에서 "유유히 하늘가로 떠가는 구름, 바라고 또 바라도 비는 못 되네. 좋은 시절 덧없이 멀리 떠나고, 이별 앞에 마음만 더욱 괴롭다(悠悠天際雲, 望望不成雨. 良辰忽已邁, 離別意更苦)."라 하여 벗을 떠나보내는 허전함을 노래했다. 하늘가의 구름은 멀리 지방관으로 내려가는 벗이고, 비가 되기를 바랐다는 것은 그가 중앙에 쓰임을 받아 그 은택이 백성에게까지 미치기를 소망했다는 의미다.
청춘의 꿈은 뭉게구름이다. 우레를 품고 큰비가 되어 대지를 적신다. 노년의 꿈은 새털구름이다. 석양 빛에 곱게 물들다 욕심 없이 스러진다.//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