失題(실제)제목을 잃어버린 시
大醉長安酒(대취장안주) 서울에서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해서
狂歌日暮還(광가일모환)해질무렵 미친 듯이 노래부르며 돌아왔네.
蓬壺多俗物(봉호다속물) 봉래산에는 속물이 너무 많기에
遊戱且人間(유희차인간) 유희하며 인간 세상에 머물고 있지.
김가기(金可基)란 기인이 쓴 시다. 그는 생몰년도 알려지지 않은 조선 후기 사람으로 기행(奇行)을 일삼은 행적이 유명하다. 신선의 행적으로도 제법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서울 술집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날이 저물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자칭타칭 신선이란 자가 뭐가 그리 불만인지 미친 듯이 노래까지 불러댔다. 어디서나 흔하게 눈에 뜨이는 술주정뱅이와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왜 그렇게 시장 바닥에서 술에 취해 사느냐고 묻는다면 내 말해주겠다.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산에서 그대들은 살아본 적이 있던가? 내가 오래 살아봐서 잘 아네만, 거기도 속물들 천지일세. 선계(仙界)에서 벌어지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짓거리에 기가 막혀서 차라리 인간 세상에 내려가 살기로 했지. 건들건들 놀면서 여기 사는 게 겉은 고고하고 화려해도 실상은 천박한 속물들 틈에서 사느니보다 낫더군. 지금 세상 봉래산에도 속물 제법 많을 테니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