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진(晉)나라에서 범씨(范氏)가 쫓겨났다. 한 백성이 그 집안의 종을 훔쳐 달아나려 했다. 종이 너무 커서 운반할 수가 없자 그는 종을 깨부숴 옮기려고 망치로 쳤다. 큰 소리가 났다. 그는 남이 이 소리를 듣고 제 것을 빼앗아 갈까 봐 황급히 제 귀를 막았다.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엄이도종(掩耳盜鐘), 또는 엄이투령(掩耳偸鈴)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여씨춘추' '자지(自知)' 편에 나온다.
큰 소리가 나니 엉겁결에 제 귀를 막았다. 제 귀에 안 들리면 남도 못 들을 줄 안 것이다. '여씨춘추'는 글 끝에 "남이 듣는 것을 싫어한 것은 그렇다 쳐도 자기에게 들리는 것조차 싫어한 것은 고약하다"는 평어를 덧붙였다. 자신의 도둑질을 남이 알게 하고 싶지 않은 심정은 알겠으나 사실 자체를 아예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는 나쁘다는 지적이다.
이규보는 '답전이지논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사람의 글을 본뜨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시를 익히 읽은 뒤에 본받아야 도달할 수가 있다. 그저 하면 훔쳐 쓰기도 어렵다. 비유컨대 도둑이 먼저 부잣집을 엿보아 대문과 담장 위치를 익숙히 파악한 뒤에 그 집에 들어가 남의 물건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고도 남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지 않으면 주머니를 더듬고 상자를 들추기도 전에 반드시 붙들리고 만다. 이러고서야 재물을 훔칠 수 있겠는가?" 또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에서는 글 쓰는 사람이 해서 안 될 아홉 가지 적절치 않은 행동을 구불의체(九不宜體)로 꼽았다. 그중 하나가 옛사람의 뜻을 훔쳐 가져오다가 그나마 제대로 못 해 금세 들통이 나고 마는 '못난 도적이 쉬 붙들리는' 졸도이금(拙盜易擒)이다.
하늘 아래 새것이 어디 있는가? 남의 좋은 점을 본받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귀하다. 누구나 공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다만 남의 것을 배워와 온전히 내 것으로 녹이지 못해 훔친 것이 들통나니 내 부족한 공부가 더없이 부끄럽다. 이때 정면 돌파가 아니라 제 귀를 꽉 막고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며 넘어가려는 태도는 피차 민망함만 더할 뿐이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