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 마음의 빗살무늬 흙그릇을 앞에 놓고
생목을 조여오던 비의 말을 들었던가
함께 짠 시간의 피륙 어디에도 없는 비
가슴 속 물웅덩이 울음 우는 물웅덩이
메우듯 오는 비에 어느 뉘 발자국인가
몸 먼저 알아채는가 살 냄새 훅! 닿는다
/한분옥
지난 겨울 눈이 적다 싶더니 메마른 논밭이며 바짝 줄어든 저수지 소식이 잦다. 봄철에 갈라지는 논바닥을 보는 것보다 목마른 노릇도 없다. 그럴 때마다 '생목을 조여오던 비의 말을' 들을지라도 비가 흠씬 다녀가길 빌게 된다. 비록 '가슴 속 물웅덩이'가 파이고 '울음'만 그득 실은 '물웅덩이'에 빠져 힘들더라도 비가 좀 길게 내려 고루 적셔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해진다.
빗소리에는 촉촉이 감겨오는 것들이 있다. 특히 봄밤의 빗소리에는 '어느 뉘 발자국인가' 기울여본 추억이 더 깊을 법하다. 멀리서 비 냄새가 끼치기 시작하면 괜스레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 시간들. 그런 비의 말은 몸이 '먼저 알아채'기도 하려니 '살 냄새 훅! 닿는다'는 파문에 빠져 덩달아 서성거린다. 하긴 지금은 꽃망울마다 후끈 달아 있을 때. 곧 터질 꽃들의 숨소리로 천지가 고요히 소란하니 비도 그 촉감이 그립겠다.
/정수자;시조시인 /그림;이철원/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