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가 모두 대가인 것은 아니지만 그림에 남다른 천재성을 보이는 화가는 분명 따로 있다. 조선시대에는 두 사람의 화가가 천재라는 칭송을 받았다. 한 분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이 눈물겨운 애사(哀詞)를 쓴 16세기 나옹(懶翁) 이정(李禎)이고, 또 한 분은 19세기 고람(古藍) 전기(田琦·1825~1854)이다. 공교롭게도 두 분 모두 나이 30에 세상을 떠났다.
고람 전기는 중인 신분으로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지냈기 때문에 별다른 이력이 없다. 다만 시와 그림에 능해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들인 우봉 조희룡, 역매 오경석 등과 가깝게 지냈다. 천재성은 누구보다 동시대 화가들이 먼저 알아본다.
우봉은 고람에 대해 말하기를 그림은 스승에게 배운 바가 없는데 문인화의 오묘한 경지에 들어갔고, 시는 세속을 훌쩍 뛰어넘는 빼어남이 있다며 "고람의 시화는 당세에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상하 100년을 두고 논할 만하다"고 했다. 감식안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추사조차도 고람에 대해서만은 "스산한 가운데 간략하면서도 담박하여 자못 원나라 문인화의 격조를 갖추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고람의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사진)를 보면 추사와 우봉의 평에 절로 수긍이 간다. 간결한 구도에 스스럼없는 필치로 단 몇 분 만에 그려낸 것 같은 작품이지만 사의(寫意)가 역력하여 선미(禪味)조차 감돈다. 나이 스물다섯에 그렸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이런 그림은 흉내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자칫 객기가 드러나 추하게 되고 만다.
그렇다고 고람이 매번 이렇게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오경석을 위해 그린 '매화초옥도'는 화면 구석구석에 필을 가한 꽉 찬 그림이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거나 남발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인품까지 갖춘 천재화가였다. 그래서 우봉은 고람의 요절에 조시(弔詩)를 바치며 "일흔 살 노인이 서른 살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자니 더욱 슬프다"며 그의 천재성을 안타까워했다. /유홍준:명비대교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