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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이 必死的으로 搬出 막으려 한 '獨島팻말'의 秘密

 

韓國人이 昨年 競賣서 購入해 國內로…… 첫 公開...1837年 新潟 海岸에 걸려 "鬱陵島 오른쪽 섬은 韓國땅 航海 嚴重히 禁止" 적혀...日 言論 "팻말 韓國가면 안돼"...日本이 韓國으로 팔려갈 것을 憂慮하던 日本 江戸時代의 나무 팻말이 劇的으로 韓國으로 넘어왔습니다. 나무팻말에는 1837年 獨島와 鬱陵島國 땅이니 日本人의 航海를 禁止시킨다는 內容이 담겨 있습니다.

 

이 팻말은 昨年 3月 日本 京都에서 競賣에 나왔습니다. 日本 産経新聞은 "當時 日本에선 獨島를 鬱陵島로 불러 지금의 獨島와 다른 곳인데 韓國側이 이를 利用해 自國의 領土로 主張하는 잘못된 主張을 한다" 며 "이 팻말이 韓國側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式으로 報道했습니다.

 

그랬던 이 팻말을 韓國人 事業家가 150万엔(2000万원)에 入手했습니다. 팻말은 日本 江戸幕府가 獨島와 鬱陵島 周邊에서 操業을 한 自國 漁民 2名을 海禁令違反으로 處刑한 이듬해에 만든 것입니다.

 

日本 競賣市場에서 150万엔(2000万원)에 팔려 韓國으로 搬入된 1837年 日本 江戸幕府時代의‘獨島 渡海 禁止’팻말. 가로 72㎝, 세로 33㎝ 크기의 소나무 팻말로 윗부분에 2個의 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獨島와 鬱陵島가 韓國 땅이라고 記錄되어 있습니다. 寫眞은 흐릿해진 글자를 判讀하기 爲해 赤外線 撮影한 것이다. 나무 팻말은 1837年 2月 江戸幕府의 命令을 받아 高田藩(たかだはん)이 新潟県 地域 海岸에 揭示한 것으로 가로 72㎝, 세로 33㎝ 크기다. 팻말 위쪽에는 두 個의 고리가 달려 있어 揭示板에 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팻말에는 "竹島(鬱陵島의 日本 이름)는 元祿(1688~1704年)時代부터 渡海 停止를 命令한 곳이므로 다른 나라 땅에 航海하는 것을 嚴重히 禁止한다"며 "竹島의 오른쪽 섬도 航海해선 안 된다"로 記錄돼 있습니다. 오른쪽 섬이란 獨島를 말하는 것입니다.

 

李相泰 國際文化大學院大學 碩座敎授는 "이 팻말은 竹島(鬱陵島)의 오른쪽 섬(獨島)까지 航海禁止를 내린 것으로 記錄돼 日本이 獨島를 韓國 땅이라고 스스로 認定한 重要한 史料"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오른쪽 섬' 이란 句節 때문에 日本側이 팻말의 搬出을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渡海禁止令 팻말은 日本의 鳥取県 浜田市 鄕土史料館에도 한 個가 남아있습니다. 가로 1m, 세로 50㎝ 크기로 이번 發見된 팻말보다 2年 뒤인 1839年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팻말은 竹島(鬱陵島)에 渡海禁止令을 내린 것으로 記錄돼 日本側은 獨島는 該當되지 않는다고 主張해왔습니다. 反面 우리는 獨島가 竹島(鬱陵島)의 附屬 섬이니 特別히 記載하지 않았다는 論理를 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팻말 發見으로 日本이 獨島를 自國 땅에서 排除한 것이 明確해진 것입니다. 팻말은 이어 "海上에서 다른 나라 배와 만나지 않도록 하고 될 수 있는 한 먼바다에 나오지 않도록 分賦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當時 日本 記錄을 보면 "江戸幕府의 渡海 禁止 通知는 팻말로 해서 揭示板에 걸어두고 古代官(こだいかん=治安擔當者)은 坊坊曲曲에 이를 알려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이런 鬱陵島•獨島 渡海禁止令 팻말은 日本 海岸 곳곳에 세워졌을 것으로 推定됩니다.

 

이 팻말은 昨年 3月 15日 日本 競賣會社인 古裂会(こぎれかい)에서 價格 120万엔으로 公開 競賣에 부쳤습니다. 日本人 3名이 138万 엔과 145万엔, 150万엔으로 應札했습니다. 万엔 差異로 落札 받은 것을 韓國人 事業家가 引受했습니다.

 

이 팻말이 競賣에 나오면서 關心을 쏟던 日本 言論들은 落札된 以後에도 150万 엔에 팔렸지만 落札者가 누구인지에 對해선 競賣會社가 緘口하고 있다는 報道와 함께 팻말 行方에 對해 關心을 보였습니다.

 

韓國人 事業家는 "이 팻말이 韓國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論調로 日本 言論이 關心을 보여 놀랐다"며 "日本側이 搬出을 禁止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보따리를 싸고 풀기를 여러 번 거듭했다"고 했습니다.

 

이 事業家는 事態가 潛潛해지길 기다려 10個月 뒤인 올 1月에야 國內로 들여왔습니다. 팻말은 國內에 들어온 뒤 좀 벌레가 먹은 구멍에서 나무가루가 繼續 흘러나와 國內 文化遺産保存硏究所에서 保存처리 作業을 거쳐 公開됐습니다.

 

팻말은 殺菌殺蟲 機能을 가질 수 있도록 薰蒸處理하고, 부스러진 表面은 傳統阿嬌로 處理했습니다. 나무 才質은 소나무였고 흐릿한 글자는 赤外線 撮影으로 判讀했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정광태
작사 박인호 작곡 박인호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땅.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 읍 독도리
동경 백 32 북위 37
평균기온 12도 강수량은 1300 독도는 우리땅.


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
연어 알 물새 알 해녀 대합실
십칠만 평방미터 우물 하나 분화구 독도는 우리땅.


지증왕 십삼 년 섬나라 우산국
세종실록 지리지 50쪽에 3째줄
하와이는 미국땅 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땅.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 없는 땅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땅.

후렴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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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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