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방

외통궤적 2008. 4. 23.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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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010204 공부방

그래도 집에서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어울려서 하는 공부는 여러모로 매력이 있었다. 모르는 것은 서로 물을 수도 있어 후련하고, 지겹고 짜증나면 장난을 칠 수도 있어서 즐겁다. 장난을 친 다음에는 으레 웃음이 가득히 넘쳐서 졸음도 쫓고 맑은 정신으로 새로운 공부가 시작되니 보람 있다. 이곳은 저절로 생긴 선생님 없는 구릅 공부방이었다.

 

무더운 한여름이 지나면서 길고 긴 여름방학도 끝난 어느 날 밤, 늘 모이든 친구들은 조잘거리는 개울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환’네 집 개울가 방에 하나씩 둘씩 모여들었다. 다섯 친구들 중 셋은 인근에 살고 둘은 조금 떨어진 윗마을에 산다. 윗마을이래야 집들이 이어진 한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지루하지 않게 길가에는 집마다 켜놓은 등불이 길을 밝혀 친구가 다니기엔 별로 불편함이 없었다. 그 친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수많은 별들이 그의 발자국소리에 맞추어 춤추고 길가의 가로등도 안짱다리 발걸음을 부추겨 오르내린다. 풀벌레소리와 흐르는 물소리가 이제 막 장막을 걷고, 나타난 무대의 장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무렇게나 놓인 친구들 신발 위에 그는 무대 주인공답게 제 신발을 포개 벗고 들어갔다.

 

넓은 갓을 쓴 전등불이 방한가운데 드리워있다. 두리반을 책상으로 하여 둘러앉은 방안의 친구들을 입이 찢어지도록 반기고 서로 조여 않는다. 그는 앉지도 않고 부엌으로 트인 여닫이 창호지문을 열고 냉수를 청한다. 그의 오후 한나절은 몹시 흥분되는 공놀이였고, 그래서 늦은 저녁을 급하게 많이 먹었나보다.

 

삼면에 각기 문이 붙어있고 한쪽 벽만이 스크린같이 희고 단조로워서 방안은 네모자비 통과 같다. 볼 것이라곤 눈앞에 펴놓은 책밖에 없다. 방안은 연필 긋는 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 냇물 흐르는 소리 벌레소리가 함께 어우러져서 그를 멀리 운동장으로 끌어냈다.

 

공차기는 다시 시작 됐다. 한탕을 뛴 뒤 넓은 운동장 그늘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등을 붙이고 누워버렸다. 등을 붙인 운동장은 시원하고 요를 깐 듯 편안했다.

 

꿈속의 신나는 공차기는 점점 재미를 더해갔다.

 

 

“꼴인” 하는 친구의 잠꼬대에 우리 모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반듯하게 누운 그의 손과 발이 조금씩 떨리듯 움직이더니 곧 깊은 잠에 빠져서 수렁을 헤매고 있었다. 우리의 눈썹은 반달을 그렸고 눈빛은 장난기로 가득 차서 반짝였다.

 

이왕이면 시원하게 재울 양, 허리띠를 조심스레 끄르고 앞 춤을 쓰려 내렸다.

 

‘?“ 나는 놀랐다. 우리들의 것과 사뭇 달랐다. 거북의 머리가 완전히 드러나고 둘러쓰고 있던 목도리가 목덜미까지 주름져 내려와서 머리와 목 사이에 깊은 골이 둘레에 뺑 돌려 패여 있다. 우리 것은 이렇지 않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모양이라 또 보고 또 보았다. 깊은 골이 더더욱 이상했다. 우리의 것은 고춘데, 우리의 것은 입만 남기고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거북의 머리? 아무튼 별난 고추를 보았다. 모두들 입이 찢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낄낄거리는 소리를 막으려 손가락을 입에다 각기 댔다.

 

시원한 바람이 운동장 그늘 밑에 큰 대자로 들어 누운 그의 가랑이를 스쳐지나갔다. 다음 게임 때까지는 멀었다. 쉬자. ‘석 돈재’는 입맛도 다신다. 간식을 하나보다.

 

또 우리의 눈이 반짝였다. 이번에는 ‘임 경환’이가 여닫이 샛문을 열고 제 방에서 벼루와 먹과 붓을 가져왔다. 한 녀석은 먹을 갈고 나는 붓을 다듬어 먹을 묻혀서 책상 위에 놓은 다음, 여차하면 뛸 양으로 신발을 찾아놓고 한숨을 돌리면서 책보를 챙겼다. 서로들 눈짓이 오갔다. 천천히 붓끝을 댔다. 그의 바짓가랑이에 늦은 여름의 시원한 바람이 다시 들어갔으리라.

 

꿈은 계속 되었다.

 

거북머리에 두 눈을 그리고 커다란 코도 그려 넣었다. 한 녀석은 맞은편에 서서 생김새를 바라보며 내 붓끝을 지휘한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제 친구 ‘돈재’는 명실이 상부한 거북의 머리를 찼다.

 

뒷정리를 흔적 없이 마무리하고 이제 마감하는 덮개를 할 참인데 이게 만만치 않다. 살그머니 바지춤을 여미는데, 그만 시합이 다시 시작됐나보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면서,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있는 우리를 보고는 얼른 손을 뿌리치며 ‘나 잠 안 잤다!’ 하며 제 딴에는 시작인줄 알고 바지춤을 여며 넣었다. 그러니 제격으로 맞아졌다. 그의 무대는 서서히 막 내리고 그의 축구시합도 꿈과 함께 깨지고 말았다.

 

다음날 그의 입이 더욱 넓어졌고 우리 또한 그의 도량을 시험하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공부방에서 스스로의 각성 책으로 이루어진 자구(自求)적 불문율이었고 이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잊을 수 없는 한 토막 생활한 극이다. 그는 우리보다 한 살 위였다.

 

살아있을지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좋은 친구였고 그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었으면, 훗날 다시 한 번 하늘을 보며 별을 날릴 웃음보를 터치리라.

 

나이가 들어서 볼 것 못 볼 것 다본 이 마당에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의 부인에게 ‘눈 자국과 코 자국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어 보지 못하는 점이다. /외통-


-열의는 성실의 특성이며,

그것이 없이는 진리가 승리하지 못한다.-벌워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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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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