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1.010226 연필 1
연필을 처음 쥐었을 때는 이 연필이 무엇에 쓰이는지를 모를 뿐만 아니라 설혹 글을 쓰는 것이란 걸 안다 하드래도 정작 제가 쓰는 것이 글인지 그림인지 그냥 칠인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흰 종이나 벽이나 가리질 않고 긋고 칠 했을 것이다. 그 재미가 쏠쏠했을 것을 누구나 기억하진 못해도 듣거나 어렴풋이 짐작은 할 것이다.
누구든지 연필을 들고 검은 종이에다 쓰려고 하지는 않을 것인데, 이 검은 종이의 억울함을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연필과 검은 종이의 마찰로써 얻는 결과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으나 연필과 상응하는 개념으로써의 종이를 우선 생각해본다면 시각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즉 연필과 대응하여 궁합이 맞는 종이는 흰 것이라야 한다는 것은 연필이 검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연필은 반드시 검은 색이라야 연필이지 ‘색연필’은 색 칠감이지 색연필로는 될 수 없는 특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편의상 부르는 것이 ‘색연필’이라면 지은이의 작은 실수이다.
검은 종이에 쓰거나 칠할 수 있는 것은 연필로는 불가능하다. 함에도 연필로 검은 종이에 쓰려고 했다면 아마도 촉각에 의한 만족을 꾀했을 것이다.
내 어릴 때 이 검은 종이에 쓰려고 달려들었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나기에 쓴웃음을 짓게 한다.
연필의 개념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긋고 칠했던 것은 그만큼 둔한 축에 속했는지를 의심할 일이다. 이렇게 연필이 나하고 인연을 맺으면서 연필에 얽힌 얘기거리가 많다.
연필을 신주 모시듯 하는 누나에 비해서 턱없이 천대하는 것이 나의 연필에 대한 대우다. 연필은 깎아서 쓰는 것이 마땅한데 게으름을 피우는 내가 연필에 대해서 오불상관하는 것은 손위의 누나가 있어서 때마다 챙겨서 깎아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령 그렇지 않았다 하드래도 나는 연필을 깎아 쓰지 않고 학교를 마쳤을 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나를 아는 내 본성이다. 즉 연필이 닳으면 무디어 지는 것인데 그때마다 깎는다면 깎다가 연필심이 부러지는 경우에 그 속상함을 미연에 막자는 것이고, 굵은 글씨가 잘못으로 지적된 적이 없고, 굵게 써서 꾸지람 듣는 어느 누구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연필을 깎다가 한 자루를 몽땅 버린, 버린 것이 아니라 깎아 없어진, 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의 상처는 이토록 사무치는가보다. 지금도 이따금 그런 연필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진저리가 처지곤 하는데, 그럴 때면 애써서 생각을 바꾼다.
겉보기는 미끈하고 겉에 칠한 연필 색이 그럴뜻해서 조심스레 칼을 대서 깎으려들면, 한 쪽은 잘 먹혀서 깎이는 소리도 연하게고 촉감도 부드러운데 같은 힘과 각도와 자세로 연필을 돌려 가면 어느새 다른 한쪽의 나무의결이 달라서 심 쪽으로 깊이 패여 들어간다. 그래서 연필심을 감싸는 끝 부분이 짝지어서 반은 심 이 길게 보이고 나머지 반은 짧게 보이니 이것이 못마땅하여서 고르게 한답시고 깎다보면 심이 길쭉하게 나와서 또 이번에는 멀쩡한 심은 잘라버리는, 아니 부러져 버리는 순환이 이뤄져 결국은 손에 잡을 수 없는 몽당연필이 되었다.
게다가, 공을 들인답시고 낭비한 시간은 고사하고 속은 것 같은 배신감에 부르르 떤다. 결국은 보기도 싫고 보기만 하면 짜증나는 그 연필은 팔이 빠지도록 멀리 던져서 내 속을 달래본다. 그래서 이후는 심만 있으면 그냥 쓴다. 사소한 일인데도 그냥 넘길 수 없는 노릇이다.
연필을 만드는 공정에서 나무의 결을 같은 방향으로 하지 않았으니 이런 결과가 된 것 같고, 더욱 속상한 것은 이런 연필이 외견으론 식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때는 그랬디.
우리 자랄 때와는 달라서 요즈음은 기계로 연필을 깎으니 인내심이 요구되지도 않고 그 되어가는 맛을 느낄 수 없어 조금은 상막할 것 같은데도 내 연필 깎던 생각을 하면 기계로 깎는 것이 오히려 통쾌하기까지 하다.
책보를 등에다 걸쳐 메고 장난을 치거나 뜀박질을 하면 ‘연필심이 필통에서 아래위로 춤추며 심이 골아서 쓸 때에나 깎을 때에 부러진다.’ 며 종이 깍지를 만들어 끼워주고, ‘필통 안에서 끼리끼리 부닥쳐서 곯는다.’ 며 필통 안에다가 곽 쪼가리를 오려서 끼워 주던, 세 살 위 누나가 새삼 못 견디게 보고 싶다. /외통-
어린이가 없는 곳에 천국은 없다.(스윈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