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9.010110 물망초(勿忘草)
‘하루꼬’는 우리 반에서 남녀를 통 털어서 몇 째 안가는 키 큰 아이였으며 공부를 썩 잘했기 때문에 잊히지 않는지는 몰라도 반의 모든 여자애중 유독 하루꼬만 기억난다.
우리들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도 크고 시골티가 나지 않아 훤하게 생긴 애였다. 늘 오른쪽 복도를 낀 맨 뒤 구석의 마지막 책상을 차지하여 앉았다. 한 개 반뿐이니까 이렇게 졸업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는 우리와 같은 나이인데도 훨씬 커서 우리와 퍽 대조되었다. 어른스러워서 우리를 상대하지 않았는데 왜 내가 그의 이름과 성을 알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 까닭을 모르겠는데, 이것이 작은 연모(戀慕)의 싹이 아니었나 생각하게도 된다.
그의 집은 동네 아래쪽의 사철나무 울타리를 두른 철도국직원 집 딸이고 성은 ‘아라이(新井)’, 아마도 박 씨가 아닌가 생각되고 이름은 그대로 ‘춘자(春子)’니까 ‘하루꼬’다.
집 앞의 울밑에 가을이면 고스모스가 하늘거리는 이 집을 조석으로 드나드는 그는 학교에서 먼 거리에 있기때문인지 늘 도시락을 갖고 다니는데, 집에 가서 점심을 먹는 나와 마주칠 기회가 없어서 못 사귀었는지, 숫기가 없어서 못 사귀었는지 모르지만 이름과 성을 알고 그의 집을 알고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풀이가 안 된다.
이것이 나를 어린 시절로 끌어서 당겨 그나마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 좌표의 구실을 하는 것을 보면 한없이 고맙고 반갑고 보고 싶고 얘기라도 하고 싶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 체념하려니 그 또한 되지 않는다. 아마도 영구히 새겨졌나보다. 훗날 사진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것이 지금의 최대 희망이다.
그립네.
풀도 아니요 꽃도 아닌
깜박이는 눈 숨결향기 가득한
반짝이는 단발머리 머릿결
그립네.
보고프네.
키 훌쩍, 긴 다리 인형 아닌
덜미가 희어 손가락 긴 가
코가 높아 얼굴이 갸름한가.
보고프네.
꽃 같네.
흔들리는 고스모스, 키 크네
바라보는 눈길 선해서
먼 곳 창가 보는 한 송이
꽃 같네.
못 잊네.
홀로 솟은 자갈 속 물망초
넓은 교실 네 귀의 한 모퉁이
잎사귀 펼쳐 모두를 감싸서
못 잊네. /외통-
젊음은 슬픔 속에서라도 언제나 그 자체로 광택이 있다.(V.위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