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3.010112 어떤 집 어느 집이든지 부침이 있게 마련이지만 내가 아는 어느 집의 근세를, 내가 본 그 집 내력을, 어린 내 마음에 어렴풋이 비친 대로, 노년의 지금 그려보려 한다. 새삼 생각나게 하는 이 집의 내력 또한 기구하다. 우리 집의 과거를 자세히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의 집은 더욱더 몰라야 마땅하지만 우리 집을 모르면서 남의 집을 더 잘 아는 절뚝발이 인생을 살고 있으니 딱하다. 안다고 해야 생사가 고작이지만 그래도 이 생사가 삶의 근본이니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시간의 차이로 하여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서로 다른 시간을 산 이들도 죽고 산 간단한 사실은 확연하게 알고 있건만, 함께 내가 산 시간 안의 것은 알아야 마땅한데도 이도 또한 감감 절벽이다. 나와함께 같은 공간 속에 살고 있지 못하고 마치 외계의 어느 곳에 지금 이 시간에도 살고 있으리란 엄청난, 착각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혼돈에 빠져있다. 내가 철벽 통 안에 들어있는지, 나는 확 트인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우리 고향 땅과 우리 집이 철벽 통 안에 갇혀 있는 건지 아리송하다. 다른 이들은 넓은 세계를 통해서나 좁은 통 안에서나 잘도 소통하며 만나고 헤어지고, 울고 웃고, 부르짖고 땅 치고, 앉고 절하고, 서서 춤추고, 하는데 나만이 이 짓을 못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야말로 망각의 세계에서 꿈꾸듯이 사는 이즈음의 나다. 그래도 남의 이야기를 함으로서 나를 의식하고 남의 집을 그림으로서 내 집을 상상하는 뼈저린 사연이 어디 나뿐이랴 마는 이렇게 함으로서 내 머리만이라도 먼 옛날 고향마을 어귀의 돌 뿌리를 그리는 것이다. 그 집은 작은 우리 마을의 토박이가 아니고 타 지역에서 이사 와서 우리 면을 다스리든 어른의 집인데 그 집 아들 형제가 우리와 나란히 자라고 있었고 그 형제는 제 아버지의 후광으로 꽤나 뻐기고 다녔다. 재종형과도 싸웠고, 그때에 형의 머리를 다치게 한 그 아들에게 아무런 징벌조치도 없었던 위세 당당한 집이었다. 해방을 맞았다. 마을은 언제나 같이 풀 냄새와 매캐한 저녁연기로 자욱하고, 이따금 오르내리는 기차소리도 변함이 없다. 어느 날, 어둠이 깔리면서 마을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손에는 저마다 한가지씩의 연장을 들고 뭉쳐서 어디론가 달리고 있었다. 우리들 꼬마들의 호기심은 이 별난 볼거리를 놓칠 리가 없다. 우리가 당도했을 때 한 무리의 청년들이 이미 마당에 상당한 집기를 들어내서 불태우고 있고 일부는 여전히 집안에 들락거리며 명주 필과 놋그릇을 챙겨 들어내면서 소리 지른다. ‘이 집은 대야도 화로도 밥사발도 주발도 나왔다!’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다. 모드들 ‘야아!!’ 함성이다. 그것은 놋그릇을 땅에 묻어두지 못했던 집들이 일본 '순사'의 입회하에 집집이 돌면서 놋그릇 공출 수색하는 협조자들에게 모두 빼앗기면서 제기(祭器)마저 내 놓아야 했던 사람들의 절규다. 그 때는 물론 일인 '순사'의 부작위 선택에 의한 가택 수색이었으니 이 집 어른의 개입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성난 군중은 통제할 수단을 이미 잃고 있었고 아무도 만류할 수 없었다. 이 집 식구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피신한 후였지만 집에 불을 지르진 않았다. 군중은 '신사( 神社 ) ' 가 있는 '매봉산'기슭으로 달려갔다. 그날 이후 이 집은 식솔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내가 이 집의 소식을 들은 것은 나도 남쪽을 택한 뒤였다. 그러니까 그때로부터 약 이십 년이 지난 뒤였다. 그 집 어른 내외는 물론 우리 또래의 형제도 세상을 하직한 뒤였다. 불과 이십 년 사이다. 그러면 우리 집은? 의문이 가지만 아직 내 뇌리에 자리한 우리 집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은 아직도 건재함을 믿고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 사고의 영역인지, 이 점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다가도 문득 따져보면 어처구니없게도 모두가 이세상사람이 아니다. 간접으로 들은 소식도 믿어지지 않고 보아야 믿어질 것 같은 옹고집도 이런 떼는 덕을 보는 셈이다. 이럴 때는 머리에 밖힌 세월은 서있고 피부로 스치는 세월만 흐르는 것인가? 하여 이 이중의 묘한 생리구조가 감탄되며 경이롭다. 이즈음 남북의 이산가족 상봉소식과 왕래가 빈번하다니 드디어 내 앞에 닥쳐서 이나마 꿈조차 깨질까 두렵다. 어느 시인의 독백이 딱 맞아 겹쳐진다. 꿈은 깨어 무엇 하리. /외통- 미덕은 행동으로 구체화시켜야 한다.(테니슨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