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2.001228 당번 토끼
빨간 눈과 긴 귀, 짧은 앞다리와 짧은 꼬리, 통통한 엉덩이, 부위별로 더듬어서 토끼의 생태를 말할라치면 재미있을 것 같다.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있어 친근하지만 정작 우리 집안에는 들이지 못하는 짐승이 된 사연을 알고 싶다.
하지만 토끼가 용궁에서 하도 혼이 난 탓인지 말을 하지 않으니 오늘은 내가 토끼를 대변하겠다.
아저씨들이 아시다시피 우리 조상들은 달나라에서 절구질이나 해먹고 편이 살았다오.
절구질을 하도 오래 서서 하다 보니 뒷다리가 길어졌고 앞발은 절구높이 만큼만 덜 길어도 되니까 옥황상제께서 모두 알아서 지어주었는데, 그때에 달에서 내려다보는 이 땅이 하도 어두워서 밝게 보려고 떼를 써서 붉은 눈을 얻었다오.
낮에는 시끌시끌해서 이곳 달까지 잘 들리지만 밤에는 무슨 짓을 하는지 도무지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따금 간신히 들리는 소리는 요상한 소리만 들리므로 이 소리를 잘 듣게 해 달라고 떼써서 귀를 크게 했소이다.
꼬리야 우리 몸이 워낙 정갈해서 잡것들이 달라붙지 않으니 쫓을 일이 없어서 불필요했소이다.
엉덩이는 절구질하다가 공이를 들고 편히 쉬게 하려고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겠소.
헌데 아저씨들이 우리를 내 몰아 아저씨들 사는 곳으로 몰아갈 욕심에서 일찍이 우리 선조들을 끌어다가 아저씨들이 사는 동산에 풀지 않았소. 그런데 그 동산이 우리가 살기엔 너무 험하고 척박하고 우리보다 사나운 것들이 우글거려서 도무지 부지할 길이 없어서 물려받은 육신을 이렇게 십분 활용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소.
당신네들의 사는 곳, 아니 내가 사는 이곳에는 나를 노리는 무리가 너무나 많소. 그래서 나를 쫓는 무리를 따돌리려면 언덕배기로 치달아야 하는데 앞다리가 길면 불편함으로 그냥 짧은 대로 갖고 있으니 달덕을 톡톡히 보는 것이오.
나를 이런 험한 곳에 데려다 놓았으니 살기는 살아야겠고 남의 눈치코치 귀치 까지 보려니 귀를 줄일 수가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간 내오라고 야단치는 무리의 소리도 먼데서 들어야 하니까 귀는 오히려 점점 더 길어 졌습니다요.
너무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살던 달에서 우리를 쫓아내고 이젠 아저씨들이 우리가 살던 달을 본 해서 만든 달력에도 십이지간을 넣어놓고 우리를 노리고 있으니 우리는 머지않아서 이 땅에서도 내 쫓길 것이 아닌지,
지금 우리는 매일같이 뒷다리로 서서 이 앞발로 달님께 이렇게 비벼가며 빌고 있습니다요.
말난 김에 다 합시다.
다른 짐승은 다 집안에 들이면서 우리만 내치는 이유를 말하리다. 우리의 앞발이 짧아서 아줌마들 숨어 다니는 곳에 재빨리 살살거리고 따라 들어갈 수 없으니까 천대하지요? 그것뿐인 줄 아세요, 우리가 남들같이 혀 바닥을 날름거리며 간질이지 못한다고? 그러면서도 굴 파든 버릇을 못 버리고 가랑이 속은 엄청나게 파고들려고 한다고? 그런 주제에 풀이나 잔뜩 처먹으니까 지저분하다고요? 그야 우리는 감자도 먹고 고구마도 먹으니까 별문제는 없을 테지만 그것 때문이라면 아줌마들이 졸라서 개발해 내라고 하면 될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필시 혀가 짧아서일 것이에요.
우리같이 깔끔한 놈을 방에 들이지 않음은 이렇게 우리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아저씨들은 영영 모를 거예요. 우리는 방에는 안 들어가도 좋아요. 하지만 우리네 귀를 잡고 들어 올리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데도 댁들이 편리하다고 해서 우리 몸을 귀에다가 매달게 하는 것은 참기가 어려워요.
우리의 귀가 커야 살아남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남을 해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남을 피해야 하니까 귀라도 밝아야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소중한 귀를 잡고 들어 올릴 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저씨들이 원망스러워요.
우리가 착하게 살려고 남의 살을 탐내지 않고 오직 계수나무 잎사귀와 푸성귀만 먹느라 이빨도 없고 혀도 짧아졌으니 이 얼마나 착한지 알기나 하세요! 날이면 날마다 남에게 쫓기다 보니 이젠 신물이 나요.
머지않아서 우리도 고기 맛을 익히고 살결을 핥고 더듬는 혀 바닥을 기를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귀도 더 키워서 아줌마들의 숨결을 더 자세히 듣고 분별해서 찾아 들어갈 거예요.
토끼의 운명이 이렇듯이 슬프니 굉장한 번식력으로 우리를 에워싼다. 우리의 주변엔 토끼의 용처도 많고 다양해서 토끼의 번식은 무한한 것 같아서 그들의 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어릴 때 토끼당번 하는 날엔 토끼의 귀를 잡고 들어보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손바닥에 닿는 따뜻한 촉감, 묵직이 힘을 실어주는 몸무게, 오물거리는 주둥이, 이런 것들이 그때의 우리 꼬마들이 사는 멋과 맛을 한껏 느끼고 보게 했다. 어떤 당번 날엔 토끼가 새끼를 낳는다고 굴처럼 깜깜하게 하여 보살피는 구실도 했지만, 토끼가 새끼 낳을 때 사람에게 들키면 제 새끼를 물어서 죽인다는 얘기는 지금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자기가 보호할 수 없는 새끼는 그들이 당할 오욕을 일직이 스스로 차단하는 본능적 행위에서 우리 인간들은 무엇인가를 음미해야할 것이 있으리라고 본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