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렸던 재갈이 4.19로 벗겨진 언로(言路)가 ‘자유당’ 이름의 자유가 무색하게 자유로워지더니 언론은 기왕의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고을마다 지역신문이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생겨났다. 일컬어서 ‘민주화’다. 식자는 알 권리를 찾아서 부나비처럼 출판물에 꾀어들었다. 또한 결사의 자유를 빙자한 온갖 단체가 생기면서 보호와 홍보나 발언의 수단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신문의 필요성을 느꼈고, 먹물이 들었다는 사람은 자기 시현(示現)의 분출구로 갖은 관심을 보였다.
뜻을 모아 일하든 친구들의 천거로, 나도 새로 일할 기회를 얻긴 했어도 어딘가 매듭이 없어 헐렁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창업 초기의 자본주는 부산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이 고장 출신 독지가가 고향 발전을 위해 얼만가를 내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인쇄기를 사는 게 고작이다. 나머지 필요 자본은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돈으로 출연하거나 품으로 출연하는 길밖에 없으니, 이런 한가(?)한 직장에서 내가 바라볼 기회는 지극히 적다.
창업은 언제나 그렇듯이, 성공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위험 또한 커서 시간과 정력의 손실뿐 아니라 신용과 인격에도 보이지 않는 타격을 입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면서도 난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한바탕 용트림이라도 하고 싶다. 어쨌든 '방랑'인데 이곳저곳 가릴 까닭이야 있나 싶고, 공과(功過)의 반반은 언제나 내게 따라다니는 동전의 양면이어서 좋은 쪽을 택하는 긍정적 정신이 혹 나를 공(功)으로 끌어들인다면 일후(日後)에 후회할 한 가지 몫을 제거하게 된다는, 내 편의적 생각을 반영,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홀가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가 호적이나마 내 손으로 만들고, 소식을 ‘에이고’에게 전하여서 내 결심을 밝혔다. 모든 게 후련히 뚫린 기분이다.
이제 나는 ‘강원도 통천군 임남면 외 염성리 174번지’가 본적이 아니라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372번지’가 내 본적지가 되는 거다.
착잡하다. 나를 스스로 호주로 등재(登載)하는 마음이 무척 서글프다. 선조도 부모도 형제자매도 모조리 하얀 종이 뒤에 묻고, 달랑 내 이름 3 글자다. 난 언제든지 내 이름 3자를 털어 버리고 내 고향의 민적(民籍) 부에 쌍쌍이 등재(登載)된 조상과 부모님 밑에 나란히 둘러선 형제자매의 틈에 끼어 나대로 키에 맞추어서 이빨처럼 박히고 싶다. 그래서 난 ‘가 호적’을 되도록 깨끗하고 단출하게 함으로써 심정적으로나마 나의 뿌리인 고향 호적을 흠나지 않게 하려고 한다.
이 많은 사람 속에 섞여 살면서, 그들의 한결같은 호적과는 다른 호적등본을 손에 쥐었을 때 느끼는 감회는 또 달랐다. 마치 우거진 숲속의 돌 위에 갓 움튼 싹을 올려놓은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하다. 고향과는 인연이 아주 끊어지는 것 같다. 내가 뿌리박을 곳은 오로지 내 집, 나의 터, 우리 집의 기둥뿌리가 박힌 주춧돌이 놓인 땅이 비로써 본적지로서의 명과 실(名實)을 다한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허망한 생각조차 든다.
호적이 둘이라니? 무엇인가 엇나가는 느낌이다. 이건 아닌데! 그러나 이 또한 현실인 것을 어떻게 하랴!
자유당이 실권(失權)하기 전에, 사찰(査察) 계 직원을 통해서 이미 사찰(査察) 대상을 벗어났으니 우리 ‘반공포로’의 적(籍)에서 떨어져 나와 온전히 독존(獨存)적 존재로 더욱 외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난 과거의 행적(行蹟)에 대해서 추호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질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위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형으로 부르며 따르는 한 경찰관은 자기의 판단으로 날 이렇게 맑게 씻어놓았다. 그렇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있는 대로의 바탕에서 살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신문사와 연을 맺기로 했다.
처음부터 기대는 크지 않은 대로, 구성원 몇몇은 수준 이하의 능력자였다. 구시대의 산물이랄까, 함량(含量)의 미달이랄까, 아무튼 문외한 내가 보아도 낯이 뜨거워서 볼 수 없다. 벽에 붙어있는 보급 계획과 판매 부수의 도표를 전지(全紙) 위에 한자(漢字) 숫자를 붓으로 내리쓰고 그 옆에다가 붉은색 붓글씨로 나란히 내리써 넣는, 그러니까 매일 한 장씩 쓸 수밖에 없는 무디고 우둔한 도표인데, 마땅히 이런 것은 막대나 선으로 표시해서 매일의 움직임을 과거와 비교 검토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전혀 아무도 개의(介意)하지 않는다.
낌새를 보니 자본을 댄 간부가 영업을 책임지고 있다면서 이런 상식 이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회사가 발전은커녕 금방 문을 닫고 말 것 같은 우려가 따른다. 그래서 며칠 동안 말미를 달라고 하고 친구 ‘오치균’에게 물었다.
그는 외근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때로는 스스로 무마하고 때로는 기사(記事)화하는, 보편(?)적 행위로 만족하고 있으면서 날 보고는 조금만 기다려 보면 좋겠다고 한다. ‘신문사는 원래가 외근직원들이 회사를 지탱’하는 생리라면서 지금은 이러나 앞으로는 보급 부수도 늘 것이고 광고 수입도 늘 것이며 출자자들도 이미 투자한 원금 손실 볼 수 없어서 계속 투자할 것이라는, 나름의 풀이를 하면서 회유(懷柔)한다.
마땅히 뿌리치고 유랑(流浪) 길을 떠나야 함에도 주춤거리고 있다.
‘에이꼬’의 그림자가 내 발목을 잡는다. 분명 발은 내 몸에 붙어있는데 걸음은 ‘에이꼬’의 걸음이다. ‘에이꼬’는 내 생활 태도에 신뢰가 가는지, 아니면 나름의 계획이라도 있다는 건지 확실치 않지만, 계속해서 주저앉기를 권유한다.
작지만 버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 시간의 실오리에 차곡차곡 꿰이고, 이 실오리에 내 한숨 찌꺼기가 함께 배이고 찌들어서 빠질 수 없는 뀀이 되어, 내 영혼의 무한공간을 풍요롭게 채운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