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

외통넋두리 2008. 9. 1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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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5478.020911 양말

 

요 몇 년 사이 우리부부는 아내의 외삼촌들과 이모가 있는 내(川) 안과 내 밖을 번갈아 오가며, 사람구실을 하느라 골몰하는 것이 하나의 행사로 굳어지고 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추석 때는 설탕이고 설 때는 양말, 이런 것을 그분들께 드리는 우리내외의 마음은 겉으론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이 되고 안으로는 내 마음을 바람 부는 들판에서 아늑한 언덕 밑으로 내려 평온(平穩)을 되찾는 꼴이 되어서 적이 바람직한데도 아내와 달리 내겐 어떤 명절이건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아픔이 되어 다가온다.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으려는 또 다른 노력을 해야 하는 포개지는 쓰라림이 있다.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는 옛 생활이지만 지워지지 않는 이 일은 때때로 모든 것을 그대로 정지하고 명상하게 한다.

 

내 어릴 때, 아버지의 들일과 산일 채비의 행장이 세월을 더할수록 새록새록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소작농의 굴레를 벗고 논밭을 우리 손으로 마련한 뒤이기에 허리를 펴고 뒷짐도 지을만한데도 예전과 다름없이 늘 비장한 각오마저 엿보이는, 아버지의 거동을 내 나이를 더할수록 소리 없는 말씀이 되어 귓전을 때리기 때문이다.

 

집신을 삼을 때부터 철저히 계획된 아버지의 의도를 지금에 와서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게 되는, 그런 일은 내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아버지의 무언의 교훈인데, 달구지에서 쓰다 해져 떨어진 밧줄을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올을 낱낱이 풀어서 도막내어 이것을 짚신 삼을 때 삼(衫)오리와 석어서 삼으시며 모양 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으시었으니 가히 가죽신에 버금가지만 물기엔 그대로 한데다.

 

그런 신발을 신으시고 산행을 하실 때는 으레 바닥없는 양말을 신으셨다. 양말이라기보다는 발 덮개에 불과한 양말을 어디에서 찾아오시는지 용하게도 찾아내시어 신으시는데, 유심히 바라보는 철부지를 바라보며 무엇이라 생각하였을까?

 

생각하면 또 한 번 눈이 흐린다. 말없이 ‘에그 이 녀석이 언제커서 날 돕겠나!’ 한숨지었을 텐데 그런 내가 아버지께 옳은 양말 한 켤레조차 드리지 못하고 몸부림만 치니 이것은 필시 나의 업인 것 아닌가 싶어서 더더욱 말 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

 

아버지는 발 덮개 밑에 몇 겹의 걸레 같은 헝겊을 깔아 대시고 발등을 덮고는 그 위에 발 덮개 양말을 포개어 아래로 쓸어서 감고 나서 삼과 밧줄나부랭이로 삼은 짚신에 발을 꽂으셨다. 그리고 들메끈을 단단히 조이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는 나를 조금도 제지하지 않으셨다.

 

어쩌면, ‘너는 이렇게 살지 말거라!’ 고 훈계라도 하신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일들이 은연중 내 이날을 있게 했고 여기에 이 양말을 초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격차가 메워질 수 없기에, 화학섬유양말은 아버지의 들메 속을 포근하게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갖다 드리고 싶은 간절한 염원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양말은 갖고 움집으로 들어가고 동굴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 다만 그래도 가고 싶을 뿐이다.

 

선조가 동굴생활이나 움집생활을 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인가? 그때에 큰 굴을 차지한 사람이 돋보이고 비좁고 옅은 동굴을 차지한 사람을 흉 볼 것인가? 그럴 순 없다.  어느 만치 주위의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았느냐가 그 가치의 척도가 될 뿐인 것이다.

 

'한국군'에 복무할 때다.  아직은 우리나라가 자립경제의 터전을 닦지 못하였을 때, 내 과거에 '북한군'의 일원으로 남하할 때 광목으로 발싸개를 하고 내려왔노라고 하면 전우들은 박장대소하면서 조소와 경멸의 야유조차 있었다.

 

그때에도 나는 작은 저항을 느꼈다. 그것을 내가 신은 양말과 옷과 군 장구가 모두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우들 의식의 저변은 자아를 잊은 허영의 거푸집만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단순 비교우위의 쾌재(快哉)를 불렀지만 나는 어쩐지 내 부모를 모독하는 것 같아서 우울했다.

 

이날까지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있었으면서 성탄절엔 아들놈의 선물을 양말 속에 넣는 보람이 있어 그때마다 작은 기쁨에 젖곤 했었지만 그것도 잠시,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아버지의 발등 가리게 양말에 아들놈의 장난감을 넣어 머리맡에 놓아두는 착각에 몇 번이나 밑바닥을 확인하는, 웃지 못 할 서글픔을 맛보는 내 눈길과 손놀림에 아내는 저도 함께 양말밑창을 올려보면서 뜻 모를 웃음과 고개를 저으며 의문을 던졌다.

 

필시 아내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을 것이고 양말 속에 넣는 선물의 의미를 내게 묻는 눈치일 것이지만 굳이 설명하려들지 않는 내 마음의 그늘이 얼굴에 드러나지나 않았는지 해서 또 정색하려한다.

 

이런 때에 생각나는 것이 이차대전 때 일본군수품인 뒤꿈치 없는 '벙어리 양말'이 생각이 난다며 둘러치기라도, 안성맞춤인 벙어리(?)양말이 지금 있다면 자루모양으로 얼마나 쓰임새 있겠나 싶다며 얼버무릴 순발력도 없는 내 미욱함이 드러난다.

 

억지로 정색을 하면서도, 가물가물 꺼질듯하면서도 선명히 드러나는 내 기억들, 그것은 세상을 살 수 있는 또 다른 힘의 원천이 되어 놀랍게도 내게 다가온다.

 

해는 지고 어둠이 깔리면서 친구들은 하나둘씩 제 집을 찾아가고 적막에 쌓인 넓은 운동장 복판에 홀로 서서 으스스한 추위마저 느끼는 듯, 그런 명절이다.

 

이렇듯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쌓아두고 있는 향수(鄕愁)는 명절 때를 맞아 그 고비를 넘는다. 모두는 즐겁지만 나만 홀로 즐거운척하는 양대 명절인 추석과 설엔 잠시 투명인간이 되어서 시공을 넘어 아버지의 산행 길에 질기고 폭신한 양말을 신겨드리고 싶다.

 

하얀 양말에 구두를 신고 대동아 전쟁을 피해서 온 우리 반의 '평양 집' 친구가 며칠 후부터 '군계일학'의 위치에서 흰 양말을 벗어 던지고 닭 무리에 섞이던 어린 시절의 평양동무 양말도, 육이오 전란 중에 학도병에 나가서 신었던 발싸개도, 한국군 복무 때 신었던 털양말도, 오늘 인사드리는 우리 앞의 처이모부가 신고계신 우리가 선물한 양말도, 아버지가 산행 때 신던 발 덥게 양말의 끈질긴 생명력을 말해주지 못한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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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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