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외통궤적 2008. 12. 2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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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31.070611 스승

불러 보고 싶었던 외마디, 그 이름 '선생님'이다. 실로 육십 년 만에 불러 보는 이름이다. 벅찬 환호가 튀어나올 그 이름 '선생님'. 눈에 어리는 '선생님', 그 외마디 ‘선생님’이다. 남들이 그처럼 쉽게 부르는, 그 흔하디흔한 선생님이 내게는 이때까지 부를 대상이 없었다. 배움의 길에서 벗어나서 들길을 외로이 걷다가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내 발자취를 돌아보고 발걸음을 옮길 나이기에 그만, 길 트여서 보일 듯 말듯 자그맣게 점하나, 갈 곳이 보일 뿐이다. 어쩌면 그 길가에 그립던 스승과의 회동(會同)의 자리가 놓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 걸음 내디뎠다. 이제 선생님이 육십 년의 긴 세월을 당겨 접고서 현실에 다가오신다. 그때 내 앞날에 내 옮기는 발자국을 지켜보시던 그 눈길을 지금 느끼고 있다. 선생님. 그 이름을 불러 본 적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사제 간에 나누는 이야기는 내게 먼 이국의 풍물 같은데, 이제 은사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게 되었구나! 그 소리가 뇌성처럼 크게 들릴 것인지 모깃소리처럼 작게 들릴 것인지는 온전히 내 몫이다.

가물거리는 기억에도 시간은 단숨에 당겨졌다. 배운 시간은 몇 시간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립던 얼굴, 불러 보고 싶었던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이라고 당당히 부를 수 있는 분이 내게도 이 천하에 계신다. 아니 지금 이 자리에 내 앞에 계신다. 외계에서 온 것처럼 나를 의식하는 나, 지금도 그렇게 외톨이다.

얼마 전에 선배님께 선생님과의 만남을 주선하시도록 졸랐다. 그렇지 않고 못 배길 것 같아서 붙들고 늘어졌다.

참으로 기쁜 날이다. 선생님은 그 후 이 땅에서 수만 명의 제자를 가르쳐서 내보냈기에 나를 기억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외면하시지는 않았다. 굳이 나 때문에 시간을 내시지는 않았을지라도 나는 섭섭하지 않다. 나를 보시려고 나오시지는 않으셨어도 지금 나와 얼굴을 마주하셨으니 나는 당당한 제자로서의 보람을 잠시 갖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흐뭇하다. 막혀있던 삶의 한구석이 틔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 세상에 스승이 계시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새겨 가라앉힐 수 있었고 내 오랜 염원이 하나 풀리면서, 나는 내생에서 마디 하나를 풀어본 셈이다. 아니 풀어낸 것이 아니라 그마다 하나를 만져보고 되씹어 새겨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 더 어찌할 수 없는 것, 내 힘이 여기까지인 것, 그나마 힘을 쓰게끔 받쳐준 선배님이 고맙다. 선배님의 주선이 없었으면 또 한 해를 그렇게 허전한 마음 가슴에 담고 보냈을 것이다.

선생님은 나를 여기까지, 이 땅에 있게 마련하신 바로 그분은 아니시지만 그때 함께 행동했던, 그 시절의 그 물에서 헤엄치던 은사였기에 조금은 계면쩍어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때의 상황을 지금 단호하게 말씀드리는데도 선생님은 망설이지 않고 힘을 내어 내 의중에 다가오시는 용기를 보이셨다.

그해 여름 방학 때 선생님은 '궐기대회'를 마친 후 우리를 데리고 '군사 동원 부'로 갔었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은 체중미달로 불합격되어 돌아왔다. 그 이튿날 등교해보면 학생만 몇십 명이 없어지고 선생님들은 한 분도 없어지지 않지 않았느냐는 내 어린애 같은 넋두리에 선생님 두 분은 입가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그랬지!' 한마디에 모든 것을 함축시켰다. 그렇다. 함축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였노라고, 그것은 그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행동이었노라고, 우리가 남아서 학생들을 깡그리 보내지 않으면 거기서 살아남을 수 없는 위치였노라고, 긴말을 녹여 담아서 내게 던지는 그 외마디다. 원망은커녕 얼싸안고 싶었다.

나는 내 처지에서의 지난날을 술회하고 내가 나온 뒤에 학교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나와 직접 관련된 은사의 그 후의 일을 알고 싶었다. 내 생에서 중요한 고비, 매듭을 지은 그 우리 반 담임선생님의 은공을 기리기 위해서도 선생님의 이름을 알아야 하겠기에, 된 말 안 된 말로 내 이야기를 끌어갔다. 내가 집을 떠나올 때의 이야기를 주된 화제에 올렸다. 내 사정을 이야기해야 선생님들도 기억을 더듬어서 내가 알고자 하는 그 물리 선생님, 우리 담임선생님의 이름을 기억해 낼 것이란 생각에서 길게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선생님들을 육십 년 전의 그때 상황으로 이끌어 들였다.

얼굴을 맞대고 지워진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키가 작고 똥똥한 물리 선생님은 함경도 사투리로 '여기는 고급중학교지만 대학가투 한 게 참 좋지 아임?' 교사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우리 학교에 부임하여 우리 반을 맡으면서 하신 그 첫 말씀이 아직도 잠재되어 있다가 지금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그 한마디를 평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나를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새롭게 궁금해지는 한 대목이 이제 또 생겨나는 참이다.

두 분 선생님은 기억해 내셨다. '박학선' 세 선배님도 무릎을 쳤다. 사실 선배님들은 잘 모르는 나의 사정 이야기지만 이럴 때는 상상의 공감도 얼마든지 펼쳐갈 수 있는, 우리 실향민의 이야기 마당이기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동참했다. 선배님들은 우리 담임선생님에게 배우지 않았으면서도 장단 맞추어 무릎을 치고 있다.

조금은 슬프다. 이렇게 작은 실마리라도 이어대서 육십 년 전 그때의 한마당을 만들어 보려는 황혼의 스승과 제자의 애처로운 모습을 담은 환성이 이북 사투리로 와작거리는, 이북 사람들만의 터전인 냉면집에서 작게 허공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을 훌쩍 넘긴 내 가슴에 '박학선' 선생님의 용모가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내 눈에 어렸다.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은 차마 당신들의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는지 내 말주변에서 맴돌기만 했다. 수학 선생님은 그때 집에도 가시지 못하고 그대로 남하하면서 피란민 속의 우리 고향 분과 결혼했으니 선생님은 이제 우리 고향 사람이 되어 어울리는 분이 되었다.

내가 부모님과 이별의 장을 마련하지 못하고 ‘증발(蒸發)한’ 회한을 토로하는 이 자리에서 선생님은 자기 일은 입도 떼지 못하시면서 스승의 자리를 지켜내셨다. 사모님은 우리 고향에서 유지의 따님이었다고, 내가 드리는 위로의 말에 선생님은 '그러니 나는 잘된 셈이란 말이지?' 그 말씀 속에는 당신도 부모와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한을 은연중에 담은 것 같아서 도리어 내가 무안했다.

이렇게 선생님은 자기의 주변을 감추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하여 내셨다. 해방과 육이오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살면서 제대로 갖춘 배움의 장이 마련되지 않았던 그때 선 후배나 사제 간의 영역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면서 팔십을 넘었거나 바라보는 우리가 할 일은 있는 날까지 서로를 잊지 않는 것이라는, 그 말씀이 지금도 귓가를 맴돈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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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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