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회화그림 2011. 2. 15. 09:05

글 찾기(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秋史金正喜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1786-1856)

추사 김정희의 초상 2008년 우현(又玄)

송영방(宋榮邦) 선생이 기존의 초상화를 ...

추사체라는 글씨체로 우리에게 유명한 서예가이자 화가였던 김정희는 조선 말기, 부패한 정치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뼈대있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조선을 망하게 만들었던 당파 싸움에 휘말려 거의 10여년 동안 제주도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힘들고 기구한 일생을 마쳤지요. 하지만 김정희는 그가 그렸던 대나무처럼 꼿꼿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며, 많은 이들에게 학문의 본질과 선비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정신 세계는 그가 그린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추사라는 호를 사용하는 김정희가 태어난 집안은 왕족의 후예로서, 본디부터 강직한 성품의 가문이었습니다. 전해오는 일화에는 그가 3세 때 붓을 잡고 글씨를 썼으며, 6세 때는 입춘첩을 써서 붙이기도 했다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나 봅니다. 24세 때는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참판까지 지내셨던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여행을 하고, 조선 학문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청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감동을 받은 그는 수많은 청나라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그 곳의 선진사상에 빠져들게 되었고, 이는 그의 학문세계에 반영됩니다. 또한 실학사상의 선구자였던 박제가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조선의 문화와 학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김정희는 선진학문을 탐구하면서 추사파라는 학풍을 형성할 만큼 조선의 선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주장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학문의 정신은 근거없는 지식과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지 말고, 사실적인 진리를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즉 실험과 연구를 거쳐서 객관적이고도 논리적인 사실만을 추구하는 것이죠. 이러한 그의 정신은, 모든 사리사욕과 허영을 버리고, 정직하면서도 대상의 본질만을 압축시켜 표현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추사체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청나라 문인에게서 “해동제일의 문장” 이란 칭찬을 받았던 추사는 <서화불분론>이란 미술 이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시, 서, 화를 일치시키는 청나라 예술의 영향으로 “글씨는 그림처럼, 그림은 글씨처럼”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장승업이 들었다면 가슴을 쥐어 뜯으며 우울해 했을 얘기지요.

김정희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서 암행어사와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가성을 거쳐 병초판서, 형조판서등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헌종6년, 1840년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제주도 유배길을 오르게 됩니다. 한참 그 세력이 하늘로 치솟던 중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권력의 무상함을 뼈 속으로 느끼며 추사는 제주도에서의 귀양살이를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재정비하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바닷바람이 많기로 유명한 그 곳에서 자신의 내면 깊숙히에 있는 모든 욕망을 바람에 날려보낸 것 같아요. 그 고독한 유배생활 중에 추사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정립하였으며, 많은 제자도 길렀습니다.

특별히 그는 벗들과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시를 짓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참선과 차를 끓이는 일로 또 한 해를 보냈다”라는 글도 남겼을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시죠? 추사와 차를 마시던 친구들은 그에 대해 “폭우나 번개처럼 당당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온화했으며 슬픈 소식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하구요.

추사는 제주도에서 풀려난 뒤에도 몇 번의 유배생활을 더 겪은 후에 관악산 기숡에서 은거하다가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영정처럼 하얀 수염과 고매한 문인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靜坐處茶半香初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듯 하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

[ 세한도(歲寒圖) (1844)]
이 그림은 김정희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자, 조선 시대 문인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세한도>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 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될 정도로 신격화, 신비화 되어 있죠. 이는 제주도 유배 중에 그의 처연한 심경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부작란도(不作蘭圖) (1844)]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추사의 전형적인 난화입니다. 그는 난과 대나무를 많이 그렸는 데요, 대원군도 그에게 난 그림을 배웠을 정도입니다. 특히 유배생활 중에 제주도의 한란을 많이 관찰하고, 아끼며 그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 속의 힘찬 난을 보면, 꼿꼿한 그의 기개가 보여지는 듯 합니다. 그나 저나 그림에 도장은 참 많이도 찍혀 있네요.

서예 가운데 한국 역사상 추사체만큼 경지에 다다른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도 드물다. 설문조사 결과 한국의 미술사가들은 모두 추사의 작품을 ‘최고의 글씨’로 꼽았다. 그 중에서도 ‘불이선란도’는 詩·書·畵의 일체를 보여주며 초서, 예서, 행서 등 다양한 글씨체를 혼융해내는 것에서 그 탁월함을 능히 알 수 있는데, 서예전공자인 이동국 씨가 이를 중심으로 추사체의 미덕을 살펴보았다. /편집자주

고도의 理念美를 전적으로 筆劃과 墨色으로 창설한 이로 추사(1786~1856)가 꼽히며, 그의 작품 중에서도 ‘불이선란도’는 최고 완숙미를 갖춘 작품이다. 혹자는 ‘세한도’를 앞세우기도 하지만 詩·書·畵의 혼융을 三絶로 완전히 보여준 ‘불이선란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불이선란도’는 추사체가 완전히 농익어 소위 碑學과 帖學의 성과가 혼융·완성되는 말년의 작품이자 서예적 추상성과 불교적 초월성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우선 작품의 구성을 보자. ‘불이선란도’는 이름 때문에 습관적으로 난초에 눈이 가게 되지만 글씨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 뿌리의 난화를 둘러싸고 한수의 題詩와 세 종류의 跋文, 自號와 다양한 印文의 낙관이 있기 때문이다. 난을 먼저 그린 후 제발을 했는데, 순서에 유의해서 봐야 그 내용적 맥락을 제대로 알 수 있다(표2 참조).


그런데 알고보면 시·서·화·각 등 다분히 이질적인 요소들이 主從의 관계없이 난화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절묘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런 조화로운 화면경영에는 그림과 글씨를 넘나드는 추사의 필법이 숨어있다. 이는 추사자신이 高踏을 추구하는 隱逸處士로서의 자부심을 표출한 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데, ‘草隸와 기이한 글자 쓰는 법으로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以草隸奇字之法爲之世人那得知那得好之也)’라고 한 데서 확인된다. 사실 ‘초예기자지법’은 문인화의 이상을 실천하는 방법론으로 동기창(1555~1636)으로부터 확인되지만, 추사처럼 蘭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이나 형상을 극단적으로 관념화 해 점과 획으로 해체시킨 이는 드물다.


그림과 글씨영역에 따라 극도로 절제된 먹의 농담, 方圓의 필이 혼융되며 구사된 난의 줄기나 글씨의 획은 이미 둘이 아니라 ‘초예기자지법’ 한가지일 뿐이다. 나아가 점획의 太細나 長短 등 서로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조형요소가 그림과 글씨에 조화롭게 하나로 적용되는 데서 ‘불이선란도’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奇怪와 古拙로 다가온다.

특히 <표1>의 1열과 2열의 ‘天’·‘達’·‘俊’·‘筆’ 과 같이 각종 획이 축약되거나 ‘有’·‘客’·‘蘭’·‘摩’와 같이 극도로 길게 강조되면서 이런 재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題詩의 章法을 봐도 <표2> ①-1의 첫 행에서 보듯 ‘不’와 ‘作’, ‘蘭’과 ‘花’의 大小대비나 예서와 행서·초서 등 서로 다른 서체의 운용을 통해 극단적인 변화 속에서도 조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표1>의 3열에서 보이는 ‘放’·‘筆’·‘可’·‘有’등과 같이 급기야는 필획마저도 뭉뚱그려지고 해체되면서 그림과 글씨의 경계를 없애기까지 한다. 난의 잎 또한 50세 전후 완성된‘난맹첩’의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은 엄격한 비수와 三轉의 묘미와, 더불어 통상적인 鳳眼이나 象眼도 생략되거나 무시되면서 그저 점획으로 해체되고 있

[ 지란병분(芝蘭竝盆) (1844)]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 는 뜻의 그림입니다. 중심부에 난초를 엷은 먹으로 그리고, 오른 쪽에 진하게 영지를 그렸는 데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이 두 가지가 추사의 정서를 보여주는 듯 조화롭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에는 대원군인 이하응과 친구 권돈인의 발문이 적혀있습니다.

[ 증 번상촌장(樊上村庄) 난 (1844)]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에 친구 권돈인을 위해 그린 작품이며 번상촌장은 번리에 살던 권돈인의 별서이름이라고 하네요. 왼쪽 위의 발문은 권돈인이 붙인 것입니다. “난초꽃과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어디에서 부는 가을바람이 사람의 애를 태우네 바람과서리에 쉽사리 꺽인다면 어찌 오래도록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난맹첩(蘭盟帖)중 염화취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난맹첩(蘭盟帖)중 염화취실

 

추사 김정희 난맹첩

 

김정희, 호고유시수단갈 / 연경루일파음시. 수식득격

[ 묵란도 (1850)]
추사를 무척 따랐던 조희룡의 작품입니다. 그는 특히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렸는데요, 추사는 그에 대해 “조희룡은 난초를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평을 합니다. 이는 화법과 기교에만 치중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나름대로 절제된 표현과 힘찬 필선은 후대인들에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1786~1856). 那將月姥訟冥司 나장월모송명사. 어찌하리오!

(유배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다)

추사 김정희: <석파의 난권에 쓰다>

'회화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라바조, 성 마태오의 소명  (0) 2011.04.13
모네의 일생과 작품경향  (0) 2011.03.03
인생도 꽃처럼  (0) 2011.02.09
르네상스화가 조토  (1) 2010.12.29
노인과 여인  (1) 2010.12.22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