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 돌파하는 국군 - 6·25전쟁 당시인 1950년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며 제1군단장 김백일 준장이‘아아, 감격의 38선 돌파’라는 문구를 말뚝에 쓰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원수가 38선 돌파를 망설이자 정일권 육군 참모총장에게 '38선 돌파에 관한 지령'을 내린 바 있다. 정 총장은 김 군단장과 함께 9월 30일 3사단 23연대를 찾아 북진 명령을 내렸다. /조선일보 DB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면서,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미국의 동아시아 방어선은 “알류샨 열도를 따라 일본에 이르고 그 뒤엔 류큐 제도로 뻗는다. … 방어선은 류큐 제도에서 필리핀으로 이어진다”고 밝혔다. 대만과 남한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는 얘기였다. 뒷날 공화당 지도자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이 지적한 대로, 애치슨의 연설은 공산주의 세력이 두 나라를 “공격하라는 초대장”이었다
미국 참전에 결정적 기여한 매카시 의원 - 미국 상원 의원을 지낸 조셉 매카시. 그는 '매카시즘(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을 불렀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미국의 6·25 참전과 대만 수호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는 양국의 은인이기도 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평양 시민대회서 연설하는 이승만 - 1950년 10월 30일 평양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국군 입성 환영 평양 시민대회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맥아더에게 훈장 수여하는 이승만 - 6·25 전쟁 당시인 1950년 9월 29일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 환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약 2주일 지난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탈환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군이 누린 우위는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시작되기도 전에 결판이 난 전쟁이라고 북한 지도자들은 믿었다. 김일성은 미국의 개입을 걱정하는 스탈린에게 “미군이 조선반도에 상륙하기 전에 남조선을 다 점령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전면 침공 보고를 받은 것은 6월 25일 10시였다. 이후 엇갈리는 보고들이 올라오는 상황에서도 그는 두루 살피고 멀리 내다보면서 과감하게 대응했다.
전황 브리핑 받는 이승만과 정부 요인들 - 6·25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정부가 옮겨간 피란지 부산에서 전황 브리핑을 받고 있는 정부 요인들. 앞줄 왼쪽부터 이승만 대통령, 신익희 국회의장, 장면 주미 대사, 무초 주한 미국 대사.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에서 이승만과 맥아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나란히 앉아있다. 이승만은 선포식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한다”고 했다./조선일보DB
19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재적 의원 198명 가운데 196명이 출석해서 투표했는데, 이승만이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엔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7월 24일 부슬비 내리는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나 이승만은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한다”고 선언했다.
1948년 7월 24일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초대 대통령 및 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연단에 선 이승만은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며,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선서했다. 당시 거의 모든 의원은 내각책임제를 지지했지만, 이승만은 사실상 혼자 힘으로 대한민국 헌법이 대통령제를 채택하도록 이끌었다./‘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5·10 총선’부터 보름이 지난 1948년 5월 31일에 국회 본회의가 열렸다. 오전 회의에서 이승만이 198표 가운데 188표를 얻어 국회의장으로 뽑혔다. 부의장엔 신익희와 김동원이 뽑혔다. 오후엔 국회 개회식이 열렸다. 애국가 봉창(奉唱),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만세 삼창으로 이어진 의례가 끝나자, 이승만 의장의 식사(式辭)가 있었다. 그는 “우리가 오늘 우리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야 모인 것
1948년 7월 17일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헌법 및 정부조직법 공포식’에서 이승만이 헌법 정본에 서명하는 모습./조선DB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개원식이 열리고 있다. 개원식에는 5·10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198명(정원 200)이 참석했다. 이승만은 개원식에 앞선 예비 회의에서 국회의장으로 당선됐다. 소련은 남로당을 앞세워 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전국에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선거는 95.5%의 투표율로 마무리됐고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이승만은 투표율이 90%를 넘은 것에 대해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표명한 것"이라고 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제헌의회 개원… 이승만 "투표율 90% 넘는 건, 세계에 민족의 애국심 보여준 것" -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 개원식이 열리고 있다. 개원식에는 5·10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 198명(정원 200)이 참석했다.
이승만은 개원식에 앞선 예비 회의에서 국회의장으로 당선됐다. 소련은 남로당을 앞세워 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전국에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선거는 95.5%의 투표율로 마무리됐고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이승만은 투표율이 90%를 넘은 것에 대해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표명한 것"이라고 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남녀 모두 평등하게 투표 - 1948년 5·10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하고 있다. 아이를 업은 여성의 모습도 보인다. 5·10 총선은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인들이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모윤숙(왼쪽) 시인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의장 메논(오른쪽). 두 사람은 연인 사이였다. /조선일보DB·'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기파랑)
한국 문제를 UN에서 다루도록 제안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이승만이 중국 난징에 들러 장제스와 회담한 후 1947년 4월 21일 귀국했다. 앞줄 왼쪽부터 김규식, 김구, 지청천, 이승만, 프란체스카. 한국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UN으로 이관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이승만의 중요한 성취였다. 이를 통해 두 강대국 간 협상이 아니라 UN의 주관 아래 자유민주국가 수립이 가능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2차 세계대전 뒤 한반도 문제가 다루어진 첫 국제 회의는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외상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①한국임시정부의 설립, ②미군과 소련군의 ‘공동위원회’의 설치, ③5년 기한 강대국들의 한국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강대국들이 신탁 통치를 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남한 주민 모두가 반대에 나섰다. 좌익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조선공산당은 “만일에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사실이라고 하면
한국 문제를 UN에서 다루도록 제안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던 이승만이 중국 난징에 들러 장제스와 회담한 후 1947년 4월 21일 귀국했다. 앞줄 왼쪽부터 김규식, 김구, 지청천, 이승만, 프란체스카. 한국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에서 UN으로 이관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이승만의 중요한 성취였다. 이를 통해 두 강대국 간 협상이 아니라 UN의 주관 아래 자유민주국가 수립이 가능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이승만 ‘정읍 선언’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 - 이승만의 ‘정읍 선언’을 보도한 1946년 6월 5일 자 조선일보 1면.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을 방문한 이승만은 “무기 휴회된 공위(共委·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南方)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미·소 공동회의 참석한 하지와 시티코프 -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에서 담소를 나누는 미 군정사령관 하지(앞줄 왼쪽) 중장과 소련 대표 시티코프(오른쪽) 중장. 한국 문제를 다루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1947년 한 차례 예비 회담과 두 차례 위원회가 개최됐지만 양측 입장 차이로 성과 없이 끝났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정치는 돈이다. 정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독립운동은 순수한 정치 활동이지만, 망명정부 지도자는 자금을 마련할 길이 마땅치 않다.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짓누른 짐이었다. 1919년에 상해임시정부가 서자, 워싱턴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에 뽑혔다. 그러나 상해의 정부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상해의 요인들은 대통령에게 상해로 와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승만이 수락하...
얄타 회담 참석한 미·영·소 정상 - 1945년 2월 얄타 회담을 위해 모인 미국, 영국, 소련 정상들. 앉은 사람 왼쪽부터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스벨트, 소련의 스탈린. 이승만은 같은 해 국제연합(UN) 창립총회가 열린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얄타 회담 때 '조선을 소련 영향권 안에 둔다'는 비밀 협약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미 정부 문서보관소
66세가 된 1941년의 이승만. 이승만이 얄타 비밀 협약을 폭로할 당시 나이는 70세였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스파이 청문회에 선 히스 - 1948년 美 하원 반미국행위위원회 청문회에서 선서하는 앨저 히스. 그는 소련 스파이였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20년 12월 28일 상해교민단의 이승만 환영회 모습. 배경에 태극기가 있고 그 위에 ‘대통령 리승만’이라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오른쪽 마지막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뒤에도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계속했고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 독립운동 직후 1919년에 상해에서 세워졌다가 1945년에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면서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렇게 26년 동안 존속하면서, 임시정부는 줄기차게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끝내 영토와 인민을 되찾아 대한민국을 세웠다. 이런 성과는 현대 세계사에 유례가 없다. 공군까지 편성한 자기 군대를 갖추고 제2차 세계대전에 당당히 참전한 폴란드 망명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소비에트
1920년 12월 28일 상해교민단의 이승만 환영회 모습. 배경에 태극기가 있고 그 위에 ‘대통령 리승만’이라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오른쪽 마지막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뒤에도 미국에서 외교 활동을 계속했고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신혼여행을 마치고 1935년 1월 24일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한 이승만 부부. 이승만은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에 참석했다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났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스승 서재필과 군축회의 참석한 이승만
동부전선 시찰 중 지프에 올라 즉석연설 - 1951년 동부전선을 시찰하는 도중 지프에 올라 즉석연설을 하며 장병들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
해방 직후부터 군대 양성을 강조한 이승만은 1951년 미군 지휘부에 한국군의 전력 증강을 요청했지만 미군 지휘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군 6사단이 1951년 5월 용문산 전투에서 대승한 뒤 미군 지휘부의 생각이 달라졌고, 이후 국군의 규모와 전력이 늘어났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1945년 10월에 귀국한 뒤, 이승만이 늘 마음을 쓴 것은 남한을 지킬 군대 양성이었다. 북한엔 이미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군사 교리에 따라 북한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한 터였다. 주한 미군 지휘부는 북한의 이런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고, 1946년부터는 미군 철수 이후에 북한군이 남침할 가능성을 공공연히 거론했다. 그래도 그들은 남한의 국방 능력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소한의 군대를 양성하면서 ‘군(army)’ 대신 ‘경비대(constabulary)’라 불렀다.
용문산 대승 이끈 6사단 병사들 - 용문산전투에 투입됐던 6사단 2연대 병사들. /육군
장 사단장과 참모들의 노력 덕분에, 23일 낮에는 흩어진 6사단 병사 상당수가 다시 모였다. 가까스로 부대 꼴을 다시 갖춘 6사단은 가평 지역 방어 임무를 맡았다. 4월 23일 해가 지자, 중공군 두 사단이 6사단을 공격했다. 6사단은 싸우지도 않고 다시 무너졌다. 병사들은 가평천 지역을 방어하던 영 연방군 후방에서 멈췄다.
24일 아침 장 사단장은 9군단장 윌리엄 호지 소장에게 병사 4000~5000명으로 부대를 재편성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사단 병력의 절반이 없어진 것이었다. 무기와 장비의 손실도 엄청나서, 소화기 2363정, 기관총 및 자동소총 168정, 로켓 발사기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야포 13문, 그리고 트럭 87대를 잃었다. 이 싸움에서 한국군 6사단은 아예 없느니만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상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유엔군 최고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으로부터 들었다. 도쿄에서 급히 날아온 리지웨이가 김포공항의 간이 건물에서 그에게 압록강까지 갈 수는 없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리지웨이의 설명이 끝나자, 이 대통령은 유엔군 최고사령관의 팔을 붙잡았다. “장군, 당신은 매우 설득력 있게 말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설득시키지는 못하셨습니다.”
아이젠하워 만나 태극기 선물 - 6·25 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2일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당선인 아이젠하워가 미군 부대 시찰 도중 이승만에게 태극기를 선물받고 있다. 아이젠하워는 1952년 11월 실시된 미국 대선에서 휴전을 공약했다.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이승만이 지속적으로 휴전에 반대하자 미국은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막는 방식으로 축출하려고 했다.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그 뒤로 이 대통령은 줄기차게 휴전에 반대했다. 이미 공산군은 밀리고 있으니,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길 수 있다고 설득했다. 지금 휴전하는 것은 힘이 부친 적군이 다시 힘을 기를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언젠가 중공군이 다시 침입하면, 그때도 미군이 태평양을 건너와서 구원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얘기했다. 한국전쟁은 자유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사이의 세계적 대결의 한 부분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은 더 싸울 뜻이 없었고 미국의 휴전 노력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이 대통령을 성가시게 여겼다. 끈질긴 설득에도 그가 뜻을 굽히지 않자, 미국은 그를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반응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 8월 14일까지였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뽑는 간선제였는데, 이 대통령이 다시 뽑힐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가 뽑히도록 해서, 이 대통령을 쉽게 축출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미국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장면과 군정에서 줄곧 경찰 책임자를 지낸 조병옥이 유력한 후보들이었다.
대통령제에선 직선제가 옳은 방안이었고, 국민들의 절대 다수는 이 대통령의 재선을 지지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1951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할 것을 제의했다. 이어 그런 개헌의 선행 조치 삼아, 전쟁으로 미루어진 지방자치 선거를 실시했다. 1952년 4월에 실시된 기초의원(시·읍·면) 선거와 5월에 실시된 도의원 선거에선 그가 이끈 ‘자유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서, 국민들이 그를 지지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2대 대통령 취임 1952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열린 제2대 대통령 취임식 연단에 선 이승만. /'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기파랑)
이런 움직임에 대응해서, 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상정하고 대통령 선거는 5월 29일에 치르기로 의결했다. 5월 17일엔 정부가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 개헌안을 공고했다. 내각책임제와 대통령 직선제가 대결하게 된 것이었다. 이 대결에선 야당이 이길 것으로 예상되었다. 야당은 국회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막강한 미국 대사관의 지원을 받았다.
이런 열세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이 대통령이 내놓은 것은 국민 동원이었다. 지방자치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국민들은 이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반면에, 국회는 타락한 지도층을 대변한다고 인식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엔 국회의원 50여 명이 배를 사서 대마도로 도망하려다 발각되었다. 해외로 재산과 아들들을 빼돌리는 의원들도 많았다. 많은 피란민이 고생하는데,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세비를 인상했다. 자유당이 동원한 전국의 시민들이 부산의 국회로 몰려들어 의원들을 성토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그들은 낮엔 시위하고 밤엔 벽보들을 붙였다.
이처럼 긴장이 높아지던 5월 23일, 무초 주한 미국 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대통령을 예방했다. 긴장된 정국을 언급하고서 그는 “정치적 마찰이 생기면, 한국에 불행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은 자신의 소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국회 안의 공산주의자 11명을 적발했으며 그들을 체포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 혐의의 증거로 50달러 신권들이 가득한 가방 두 개를 보여주면서, 북한에서 홍콩을 거쳐 국내 공산주의자들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압수되었다고 설명했다.
1952년 5월 26일에 부산, 경남, 전남, 전북의 23개 시·군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5월 24일에 부산 인근 금정산에 주둔한 미군 공병대를 공비들이 습격했는데, 계엄령은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조치였다. 계엄군은 곧바로 ‘국제공산당 공작금’ 사건에 연루된 의원들을 체포했다. 다른 의원들은 숨거나 연금되었다.
특이하게도, 계엄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1916~1983) 소장인데 부산과 경남의 계엄사령관은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 소장이었다. 원 소장은 이 대통령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이 참모총장은 계엄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1개 사단을 부산 지역으로 보내라는 신태영 국방장관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리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훈령을 내렸다.
격노한 이 대통령이 이 참모총장을 호출하자, 그는 밴플리트 장군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혼자 경무대에 갔다가 구금되거나 납치될 가능성을 걱정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그를 호되게 질책했다. 그러나 밴플리트가 “나는 한국의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지만, 작전권이 나에게 있는 이상 부산에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안 된다”라고 말해서, 이 문제는 풀렸다.
이 일화엔 또 하나의 차원이 있었음이 뒷날 드러났다. 당시 미국 대리대사였던 앨런 라이트너는 1973년의 대담에서 한국군 지휘부의 모반 음모를 밝혔다.
“어느 늦은 밤 내가 살던 대사관저 문 앞에 지프가 닿더니 한국 육군 참모총장이 들어왔어요. 그는 자신이 다른 (참모)총장들도 대변한다고 말했어요. 군부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지만, 후방 전선(home front)이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그가 말했어요. (…) 육군 병사들과 해병 몇 명으로 그의 사람들이 대통령, 내무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을 가택 연금시킬 수 있다고 말했어요. (…) 그들은 지금 감옥에 있는 40 내지 50 명의 국회의원들을 석방하고 그들과 숨어버린 다른 의원들에게 나와서 선거를 치르라고 독려할 것이라고 했죠. (…) 자신이 참모총장인 한국 육군이 유엔군의 지휘를 받으므로, 그는 자신이 움직이기 전에 미국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이 음모의 주동자들은 아주 동질적이었다. 이종찬 소장(일본 육사 49기), 작전교육국장 이용문 준장(일본 육사 50기) 등은 충실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고 일본군의 습속을 깊이 받아들였다. 일본군의 독특한 습속들 가운데 하나는 하극상(下剋上)이라는 기괴한 행태였다. 군국주의에 열광한 젊은 장교들이 장군들에게 자신들의 뜻을 강요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암살했다. 이런 행태는 흔히 젊은 장교들이 주동한 군부 반란으로 발전했다.
1945년 8월에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방송을 막고 전쟁을 계속하려고 소좌 1명과 중좌 1명이 일으킨 모반은 대표적이다. 그들은 동참을 거부하는 근위사단장을 살해하고 위조 명령서로 병력을 동원해서 황궁을 점령했다. 그리고 일왕의 측근 대신들과 일왕의 육성 녹음판을 수색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진압군이 이르자, 그들은 자결했다. 이렇게 봉기한 장교들에겐 일왕도 폐위할 수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위험을 잘 알았으므로, 히로히토는 항복 방송을 하기 전에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두 동생으로부터 충성 약속을 받아 놓았었다.
1952년 5월에 모반을 기도한 한국군 고급 장교들은 그처럼 기괴하게 뒤틀린 일본군의 습속에 물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정치 지도자가 지니는 권위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고, 기회가 오면, 군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종찬의 제안은 불법적이었지만, 라이트너는 그것을 선뜻 받아들였다. 그리고 국무부에 그 제안을 보고하고 받아들이라고 건의했다. 이어 그는 유엔 한국위원단과도 이 제안을 논의했고 “하늘이 보낸 기회”라는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라이트너의 경솔한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하는 것은 미국으로선 큰 문제였지만,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다는 데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했다.
달포가 지난 뒤, 라이트너는 이종찬과 국회의장 신익희에게 미국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는 의원들을 도와줄 마음이 없음을 알렸다. 미국의 지원으로 손쉽게 이승만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버텼던 야당 의원들은 낙심해서 이 대통령에 대한 저항을 포기했다.
이런 상황을 수습하는 방안으로 이 대통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에서 발췌한 몇 개 조항을 넣은 절충안이 국무총리 장택상에 의해 마련되었다. 뒤에 ‘발췌개헌안’이라 불린 이 개헌안은 7월 4일 국회에서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가결되었다.
마침내 1952년 8월 5일에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승만이 72%가 넘는 523만여 표를 얻었고, 2위인 이시영이 76만여 표를 얻었다. 이 대통령은 기형적인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데 성공했고, 선거에서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정치적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축출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국제 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유엔 한국위원단의 1953년도 보고서는 “대한민국의 기본적 헌법 구조는 대의적(representative)이고 민주적으로 유지된다”고 평가했다.
대의(大義)와 소절(小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이승만은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젊어서는 막일도 했지만, 주로 연설 사례금으로 생계를 꾸렸다. 박식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잘해서, 그는 늘 인기가 높았다.
자연히, 그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바삐 움직였다. 한번은 워싱턴의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이 있었다. 당시 이승만 부부는 뉴욕에 있어서, 시간이 촉박했다. 이승만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신호등을 무시하면서 차를 몰았다. 곧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기동경찰 오토바이 두 대가 쫓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더 빨리 몰았다.
그렇게 빨리 몬 덕분에, 그들은 경찰차에 따라 잡히지 않았고, 이승만은 시간에 맞춰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열변을 토했고, 청중은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그머니 돌아보니, 그들을 쫓아온 기동경찰관 두 사람도 입구에 서서 손뼉을 치고 환호하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이승만이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는 사이, 경찰관 한 사람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다가왔다. “20년 동안 기동경찰을 하면서, 내가 따라잡지 못한 교통 법규 위반자는 당신 남편뿐이오. 너무 일찍 천당에 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을 시키시오.” 그러고는 씩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만들어 보이고는 떠났다. 그 뒤로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에게서 운전을 배워서 자신이 차를 몰았다.
이 사소한 일화에서도 이승만의 성품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늘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에 막히지 않았고, 작은 고려 사항들에 얽매이지 않았다. 민족을 이끌고 난세를 헤치면서, 그는 소절(小節)에 얽매여 대의를 그르친 적이 없었다.
이승만이 심은 나무는 숲이 됐다
소나무 몇 그루뿐이던 70년 전 청와대… 이승만이 심은 나무는 숲이 됐다 [나무박사 박상진이 들려주는 청와대의 대통령 나무] [上]
청와대에는 역대 대통령의 사연이 깃든 나무가 있다. 대통령 기념식수에는 국정 철학과 국가적 염원이 담겼다. 청와대 경내의 나무를 조사한 ‘나무 박사’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를 통해 청와대 속 대통령 나무 이야기를 들어본다.
녹지원 서쪽 계곡에 전나무를 심고 있다(왼쪽). 오른쪽 사진은 한 아름 둘레의 거목으로 자란 전나무의 현재 모습. 박상진 교수가 “키가 25m나 된다"고 손을 높이 올려 보였다. /국가기록원·이태경 기자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 동안 청와대(당시 이름 경무대)를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다. 그가 처음 입주할 즈음 북악산 자락인 청와대 일대는 소나무 몇 그루만 있는 황폐한 야산이었다고 한다. 전국의 산들도 마찬가지여서 이 대통령은 식목일을 제정하고 임기 내내 나무 심기를 강조했다. 조선일보 1959년 4월 6일 자에 대통령이 식목일을 맞아 “경무대 경찰서원과 함께 전나무, 잣나무, 낙엽송 등 6000여 그루를 경무대 일대에 기념식수했다”는 기사가 있다.
◇1960년 심은 전나무, 아름드리 거목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3월 25일 청와대(당시 경무대) 녹지원 서쪽 계곡에 전나무를 심고 있다. /국가기록원
1960년 3월 25일, 이 대통령이 직접 나무를 심는 사진이 국가기록원에 남아 있다. 수종은 전나무. 이 나무가 지금 녹지원 서쪽 계곡에서 키 25m, 한 아름 둘레의 거목으로 자라 있다. 나이는 나이는 73살이다. 박 교수는 “남아 있는 사진 덕분에 이 대통령의 기념식수임을 공식 확인한 유일한 나무”라며 “사진 속의 수형(樹形), 가지 뻗음, 잎 모양은 물론이고, 사진 위쪽 왼편 능선으로 옛 본관의 지붕 일부가 보이기 때문에 나무를 심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전나무 부근에는 크기가 비슷한 전나무들이 몇 그루 더 있고, 잣나무와 낙엽송도 함께 자라고 있다. 박 교수는 “크기나 나이로 봐서 이 대통령이 1959년에 심은 나무 일부가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지난해 ‘대통령, 청와대에 나무를 심다’를 출간한 박 교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협조를 얻어 지난 5월부터 청와대를 매일 출퇴근하며 추가 연구를 계속 하고 있다. 그는 “책을 쓸 때만 해도 몰랐던 부분”이라며 “요즘 조사를 계속하면서 이 일대 나무들이 이 대통령이 심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모두 빨리 자라고 줄기가 곧으며 무리를 이루어 숲을 만드는 특성이 있는 나무들이다. 박 교수는 “이 대통령은 산을 푸르게 만드는 일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자란 나무의 쓸모를 생각해 곧게 자라는 전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했다.
박상진 교수가 이승만 대통령이 심은 전나무 앞에서 “키가 25m 되는 거목으로 자랐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태경 기자
박 교수는 “이 대통령이 직접 심거나 가꾼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20그루가 녹지원 서쪽 계곡에서 아름드리 거목이 돼 숲을 이루고 있다”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숲’으로 이름 지어 특별히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녹지원 서쪽은 북악산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작은 계곡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빼곡한 숲을 이루고 있어 그윽하고 운치 있는 곳이라 관람객들이 산책하면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만난 50대 여성은 “서울 시내에 이렇게 좋은 숲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았다”고 감탄했다. 우리 전통 수종인 전나무, 잣나무, 낙엽송만 있는 게 아니다. 백합나무, 루브라참나무, 상수리나무, 단풍나무, 말채나무 등이 섞여서 자라 절경을 이룬다.
이승만 대통령이 청와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백합나무. 올해 나이 70살 전후다. /박상진 교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백합나무. /박상진 교수
숲을 거닐다 보면 매끈한 줄기가 하늘로 곧장 치솟아 오르며 자란 20m 넘는 백합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백합나무는 꽃이 튤립 모양이라 튤립나무라고도 한다. 모두 9그루이고, 올해 나이 70살 전후에 이른다. 숲의 남쪽에는 루브라참나무도 4그루 보인다. 박 교수는 “백합나무와 루브라참나무는 미국 동남부가 원산지”라며 “나이나 굵기로 봐서 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심은 나무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 대통령이 미국에서 학위를 받았던 프린스턴대학을 비롯해 석사과정을 거친 하버드대, 학부를 졸업한 조지워싱턴대 등 미국 동부 일대에 널리 자라는 나무들이다. 교정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어서 그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동안 친숙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루브라참나무. /눌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낙엽송. 바늘잎나무이지만 노란 단풍이 든다. /눌와
이 대통령은 또 가로수로 흔히 심는 플라타너스를 좋아했다. 시인 조지훈이 1956년 ‘신태양’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서울에 오래된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무성하게 된 것은 이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박 교수는 “청와대 경내에도 플라타너스를 심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경복궁 서쪽 효자로에 이 대통령 지시로 심은 20여 그루가 지금도 자라고 있다”고 했다.
허윤희 기자 입력 2023.10.20. 03:00 업데이트 2023.10.20. 11:26 83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