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80.231101 삶이란 붉게 물들어서 짙은 땅거미를 드리운 황혼의 나는 이즈음 별난 생각이 불쑥불쑥 난다. 이 엉뚱한 생각을 펼치지 않고선 마음을 가눌 수가 없으니 이렇게 토한다. 사람의 머리카락, 거웃, 손톱은 끊임없이 자란다. 이러기 위해 먹고 싸는 것이 곧 사는 것인가? 사람은 사람답게, 짐승은 짐승답게, 나무는 나무답게 푸성귀는 그들답게, 제각각 나름으로 자라고 묻히고 먹히고 시들고 말라버리는 게 삶인가? 그렇다면, 달리 세포를 이루지 않은 돌, 땅, 흙, 더욱 물, 공기, 연기는 삶이 없는가? 죽은 것인가? 아닌 것 같다. 알려진 대로, 동물은 유기물을 영양분으로 섭취하며, 운동, 감각, 신경과 같은 여러 기능이 있어서 산다고 하고, 식물은 한자리에서 빛을 받아 푸른 세포 색소와 어울려 영양분을 섭취함으로 신경과 감각 구실이 없어도 산다고 하는데, 이렇게 스스로 어떤 행위로써 산다고 한다면, 이와 달리 바위나 흙이나 구름이나 연기라든지 다른 여러 물질은 모두 죽었다고 해야 옳다. 죽은 돌? 죽은 구름? 죽은 연기? 여기에서 내 목 고개는 저어진다. 있는 것은 모두 사는 것인데, 그것들에 대한 사람의 표현이 물질마다 다르게 여기며 일러 부를 뿐이란 생각이다. 산다는 것은 있다는 것이다. 존재의 한순간 개념으로 읽을 때 삶과 죽음은 같다고 하고 싶다. 산다는 것은 움직이며 연속하고, 고정으로 연속하는, 그 행위가 연속됨을 이르니 그 삶의 원인은 그것의 존재 근원인 시간의 한 점(찰나, 순간)에 있다가 꺼지는 것이기에 원래의 있던 것이 그 삶의 원초라고 본다. 달리, 미생물은 죽은 것인가? 아니면 산 것인가? 이 역시 산 것이다. 왜? 있으니까! 그렇다. 거듭 생각하여, 스스로 생명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그 생명현상 유지는 스스로가 아니고 따로 주어진 조건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볼 때, 즉 그가 존재하게 되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생명 유지의 주체가 될 수 없으므로 죽음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주어진 환경에 적응(適應)하며 존재할 뿐이다. 라고 하고 싶다. 되돌아가서, 사람의 말로, ‘산다’라고 함은 사람끼리의 생각이거나 말함이지, 사람 이외의 모든 사물은 살고 죽고를 모른다. 다만 즐기고 고맙게 여기며 자기 존재를 이어간다, 달리. 순간순간에 있을 뿐이다. 풀은 번식을 위해 씨앗을 만들면서 꽃을 피우거나, 줄기로 내거나, 뿌리로 뻗어서, 있는 저를 있게 하는 힘에 합치려는 것이다. 이처럼 있는 모든 사물은 나름으로 현상을 이어갈 것이다. 나무를 살펴보면, 나무는 그들대로 번성(繁盛) 과정의 경쟁에서 이기는 방편으로 번성할 테고, 경쟁에 저서 물러서는 쪽은 자기를 있게 한 힘에 다가가는 것인즉 간접(間接) 번성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사람의 생각과 말로 여겨도, 동식물도 모두 있으니 사는 것이고, 있으니 죽은 것이다. 즉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말은 사람의 것이기에 ‘죽고 사’는 것으로 가르지만, 절대자의 처지에서는 모두 사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사멸(死滅)했다고 보드래도, 우리 생각의 한계를 넘어서면 다른 형태(形態), 형상(形狀)으로 있으니까! 모두 사는 것이다./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