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불(古佛) 맹사성 고택 최영 장군이 살던 집으로 북향 명당(집)으로 유명하다. 10세 때 이사 왔으며 고불은 최영의 손녀사위다.
1.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열아홉에 장원 급제하여 스무 살에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무명 선사를 찾아 물었다.
“스님 군수인 제가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라고….”
“그건 어렵지 않지요.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고작 그것뿐이오?”
맹사성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스님은 녹차나 한잔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그는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그의 찻잔에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다.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차를 따른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난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 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워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간다.
그러다가 문틀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
2. 비가 새는 초라한 집에서 맹사성은 효성이 지극하고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음악을 좋아하고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직 나라에서 주는 녹미(요즘의 월급)만으로 생활을 하는 청백리다
보니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그의 생활에는 한 점의 티도 없었다.
어느 비 오는 날 한 대감이 그의 집을 찾았다.
대감은 속으로 놀랐다.
세상에! 한 나라의 정승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초라하게 살다니 안으로 들어가서 맹 정승을 만난 대감은 더욱 놀랐다. 여기저기서 빗물 새는 소리가 요란하고 맹 정승 부부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그릇 갖다 놓기 바빴다.
대감은 그만 눈물이 핑 돌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대감께서 어찌 이처럼 비가 새는 초라한 집에서.“
”허허, 그런 말 마오. 이런 집조차 갖지 못한 백성이 얼마나 많은지 아오? 그런 사람들 생각을 하면 나라의 벼슬아치로서 부끄럽소. 나야 그에 비하면 호강 아니오?“
3. 맹사성의 흑기총(黑麒塚 검은 소 무덤)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해 봄날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1360∼1438) 대감이 집 뒤 설화산 기슭을 오르던 중 어린 동자들에게 시달림을 받는 큰 짐승을 발견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들은 짐승의 눈을 찌르고 배 위에 올라타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짐승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꼼짝도 못 했다. 평소 남의 일에 참견 하지 않는 고불이 호통을 쳤다.
‘이런 고얀 녀석들! 잘못하는 짐승을 돌보지 않고 못살게 굴어야 하겠느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혼비백산한 아이들이 줄달음치고 난 다음 고불이 가까이 가보니 검은 소가 탈진해 있었다. 얼른 집으로 가서 소죽을 쑤어다 먹이고 극진히 간호했다.
기운을 차린 검은 소가 꼬리를 치며 고불을 따라왔다. 집에 데려와 정성껏 거두며 주인 잃은 소를 찾아가라고 동네방네 소문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고불은 이 소를 수족처럼 아끼며 한평생을 타고 다녔다.
세종 20년(1438) 79세로 고불이 죽자 검은 소는 사흘을 먹지 않고 울부짖다가 죽었다. 사람들이 감동하여 고불 묘 아래 묻어 주고 흑기총(黑麒塚)이라 이름했다. 지금까지도 검은 소 무덤 흑기총은 고불 묘를 금초할 때 빼놓지 않고 벌초하여 잘 보존되고 있다. /받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