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장단(一脚長短)
말에도 품격이 있다. 표현에 따라 같은 말도 달리 들린다. 한 젊은이가 어떤 사람이 다리 하나가 짧다고 말하자, 홍석주(洪奭周)가 나무랐다. “어째서 다리 하나가 더 길다고 말하지 않느냐? 길다고 말하면 짧은 것이 절로 드러나니 실은 같은 말이다. 말을 할 때 긴 것을 들고 짧은 것은 말하지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입의 덕[口德]이다. 남을 살피거나 일을 논의할 때는 진실로 길고 짧음을 잘 구분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때 자기의 장점을 자랑하고 남의 단점을 드러낸다면 군자의 충후한 도리가 아니다.” ‘학강산필(鶴岡散筆)’에 나온다.
박지원이 ‘사소전(士小典)’에서 말했다. “귀가 먹어 들리지 않는 사람은 ‘귀머거리’라 하지 않고 ‘소곤대기를 즐기지 않는다’고 하고, 실명한 사람은 ‘장님’이라 부르는 대신 ‘남의 흠을 살피지 않는다’고 하며, 혀가 굳고 목이 잠긴 것을 ‘벙어리’라 부르지 않고 ‘남 비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등이 휘고 가슴이 굽은 것을 ‘아첨하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며, 혹 달린 사람은 ‘중후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전의 현감을 지낸 홍휘한(洪徽漢)은 얼굴이 너무 시커메서 동무들이 그를 소도둑[牛賊]이라고 놀렸다. 나중엔 별명이 되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 참판 홍인호(洪仁浩)가 말했다. “소도둑이란 이름이 우아하지 못하니 오늘부터 축은(丑隱)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하였다. 홍공이 만년에 마침내 축은으로 행세하였다. 다산의 ‘혼돈록(餛飩錄)’에 나온다.
오래전 명일동으로 한학자 손종섭 선생을 찾아뵌 일이 있었다. 선생의 책 ‘옛 시정을 더듬어’를 읽고 깜짝 놀라서였다. 당시 80을 바라보던 선생과 아파트의 좁은 서재에서 손수 타온 차를 앞에 두고 공부 이야기를 했다. 우리말의 운율을 얘기하다 7·5조 가락 얘기가 나왔고, 일본 하이쿠의 5·7·5 음수율로 화제가 번졌다. “내가 하이쿠의 앞쪽 다섯 자를 줄여 7·5로만 시를 지어 보았어요. 길 가는데 앞에 다리가 불편한 이가 걸어가면 그 사람을 지나쳐 가기가 참 미안하지요. 그래서 ‘저는 이 앞서 가기/ 차마 어려워’라고 해 보았어요.” 다른 귀한 얘기보다 이 말씀이 오래 두고 생각난다.//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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