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 모 - 미
■ 모수자천 毛遂自薦
[터럭 모/이룰,마침내 수/스스로 자/천거할 천]
☞자기가 자신을 추천함
[출전] 사마천『사기』
[내용] 중국 고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조(趙)나라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왕족(王族)이었던 공자(公子) 평원군(平原君)은 어진 성품에 빈객(賓客)을 좋아해 당시 조(趙)나라의 재상(宰相)까지 맡으면서 수하(手下)에 수천 명의 식객(食客)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쪽의 강한 진(秦)나라가 동쪽의 여러 나라들을 침략해 오고 있던 차에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까지 포위를 당하게 되자 조(趙)나라는 남쪽의 초(楚)나라와 합종책(合從策)으로 연합을 하기 위해 초(楚)나라로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바로 평원군이 그 협상의 사신(使臣)이 되어 출국하게 됩니다.
평원군은 함께 떠날 용기있고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 20여명 뽑았습니다. 그런데 식객(食客)들 가운데 19명을 뽑고 한 명을 더 뽑기가 어려웠는데, 그 때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앞에 나서면서 자신을 데려가라고 자천(自薦)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평원군은 모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진 선비의 처세란 마치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그 끝이 보이기 마련인데, 자네는 나의 문하(門下)에 기거(寄居)한지가 삼 년이나 지났는데도 내가 아직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무슨 능력이 있는가?
"하지만 모수(毛遂)는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저는 오늘에야 처음으로 주머니 속에 넣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만약 일찍 주머니 속에 넣어 주셨다면 비단 송곳 끝만 보이겠습니까? 송곳 자루까지 모두 내보여드렸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호언장담(豪言壯談)하는 모수(毛遂)의 말을 믿고 평원군은 모수를 일행에 가담시켜 초(楚)나라로 들어갔고 부진한 협상 테이블에 과연 모수가 뛰어올라 초왕을 꾸짖으며 뛰어난 언변(言辯)으로 합종(合從)의 협상을 단판 짓고 혈맹(血盟)의 의식으로 서로 돌려가며 희생(犧牲)의 피를 함께 나누어 마시게 됩니다.
돌아오는 길에 평원군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다시는 선비의 관상을 보지 않겠다. 모 선생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모 선생의 무기는 단지 세치의 혀였지만, 그 힘은 정말 백만의 군사보다도 더 강한 것이구나."
그리고는 모수를 상객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원문] 毛遂曰: 三年於此矣.平原君曰: 夫賢士之處世也,譬若錐之處囊中, 其末立見. 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 左右未有所稱誦, 勝未有所聞, 是先生無所有也. 先生不能, 先生留. 毛遂曰: 臣乃今日請處囊中耳. 使遂蚤得處囊中, 乃穎脫而出, 非特其末見而已. 平原君 竟與毛遂偕.十九人相與目笑之而未廢也
[참고] 囊中之錐
■ 모순 矛盾
[창 모/방패 순]
☞말이나 행동의 앞뒤가 서로 일치되지 아니함.
[동] 二律背反(이율배반)自家撞着(자가당착)
[출전] 『韓非子』難勢篇
[내용] :「초나라 사람 중에 방패와 칼을 파는 사람이 있어 이것을 좋다고 자랑하며 말하기를,“이 방패는 굳고 단단하여 ?히 뚫을 수 없다.”하고, 또 그 창을 자랑하며 말하기를,“이 창의 날카로움은 어떤 물건이든지 뚫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길“그러면 그대의 창으로 그대의 방패를 뚫는다면 어찌되겠소?”하니, 그 사람이 능히 대답을 못 하더라.
[원문] [楚人에 有?盾與矛者하여 譽之曰“吾盾之堅은 莫能陷也라”하고, 又譽其矛曰“吾矛之利는 於物에 無不陷也니라”或曰“以子之矛로 陷子之盾이면 如何오.”其人이 不能應也러라.]
초인 유육순여모자하여 예지왈 오순지견은 막능함야라하고 우예기모왈 오모지리는 어물에 무불함야라 하거늘 혹왈 이자지모로 함자지순이면 하여오 기인이 불능응야러라
[참고] 모순은 한비자가 요순이래의 덕치를 이상으로 하는 儒家를 비판한 것이다.곧, 창과 방패는 요와 순을 나타낸다.요임금 때에 순이 농부의 사움과 어부의 분쟁을 조절하고 陶器가 조악해지는 것을 막았다. 공자는 이러한 사실을 '성인의 감화'라고 기렸지만 한비자는 이 부분을 自家撞着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인이 군주의 자리에 있어 덕치가 이루어졌다면 농부나 어부의 분쟁도 도기의 조악함도 이미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순이 어디에다 덕을 폈겠는가? 이것은 순을 현이라고 한다면 요의 덕치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요를 성인이라고 한다면 순의 덕화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때문에 두사람을 동시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박갑수(외)의 한문교과서>
[예문]
▷ 사회의 구조적 모순▷
▷ 모순을 드러내다
▷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다
▷ 네 이야기는 모순이 있어 잘 이해할 수가 없다.
■ 목경지환 木梗之患
[나무 목/인형 경/어조사 지/금심 환]
☞나무인형의 근심. 타향에서 객사하여 돌아옴.
[출전] 『사기색은(史記索隱)』
[내용] :「맹상군은 제나라 전영의 천한 첩이 낳은 아들이다. 전영은 5월 5일에 태어난 사내아이는 훗날 자기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는 미신을 믿고, 맹상군을 키우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맹상군의 어머니는 몰래 키웠으며, 장성하여 전영의 대를 잇게 되었다.
맹상군은 제후와 빈객들을 모두 불러들여 귀천의 구분 없이 후하게 대접했다. 이 때문에 그의 식객은 수천 명이나 되었으며, 그가 어질다는 소문은 각지로 퍼져 나갔다. 맹상군의 서쪽의 진나라 소왕을 만나기 위해 진나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의 일이다.
빈객들이 백 번이나 간언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세상의 일로 나에게 간언하는 것은 전부 아는 일이다. 만일 영적인 세계의 일을 들어 나에게 간언을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죽일 것이다." 알자가 들어와 말했다. "영적인 세계의 일을 주청하러 빈객이 찾아왔습니다."
맹상군은 말했다. "들여보내라." 빈객이 말했다. "신은 이곳으로 오면서 치수 위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흙으로 만들어진 인형이 마침 나무인형과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무인형이 흙인형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흙인데 인형으로 만들어졌군요. 폭우가 쏟아져 내려 물이 불면,당신은 무너지는 것을 막느라 부서지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흙인형이 응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막다가 나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당신은 정원에 있던 복숭아나무인데 깎여 인형이 되었군요. 큰 비가 내려 물이 불면, 당신은 반드시 둥둥 떠내려 오면서 멈출 줄을 모를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사방이 요새로 막혀 있는 강한 나라인데다가 호랑이와 이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진나라로 들어가 나무인형의 화를 입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맹상군은 진나라로 가지 않았다.
■ 목불식정 目不識丁
[눈 목/아니 불/알 식/고무래 정]
☞눈이 정자도 알지 못한다. 쉬운 글자도 모르는 매우 무식한 사람.
[동] 一字無識(일자무식) : 한 글자도 알지 못한다/魚魯不辨(어로불변) :‘魚’와‘魯’를 분별하지 못하다./目不之書(목불지서) : 눈으로 책을 알지 못하다. / 숙맥불변 菽麥不辨 [콩 숙/보리 맥/아니 불/분별할 변] ☞콩인지 보리인지 분별하지 못한다.
[속담]..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 /가갸 뒷자도 모른다.
[내용] : 唐나라 때 장홍정(張弘靖)이란 사람은 못나고 무식하며 행동 또한 오만불손(傲慢不遜)하였다. 그러나 부친인 장연상(張延賞)이 조정에 끼친 공적이 많아 그 덕분으로 그의 벼슬길은 매우 순탄하였다. 그가 노룡(盧龍)의 절도사(節度使)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부하들과 어려운 병영생활을 하려 않고 가마를 타고 즐기며 군사들을 괴롭히고 교만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부하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니 오히려「천하가 무사한데 무리들이 포와 활을 당기는 것은 丁자 하나를 아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꾸짖었다.
[원문] 天下가 無事한대 而輩挽石弓은 不如識一丁字라
[예문] ▷ 언문을 안다고 나선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사람들 뿐이었다.≪朴種和, 錦衫의 피≫
▷ 통감(統監) 셋째 권까지는 뱄더랍니다마는 이십여년을 이렇게 살아 오니 무에 남았겠습니까? 그저 목불식정(目不識丁)을 면하였을 따름이죠.
▷ 우리 이번에 같이 내려갑시다. 예산 없이 동경 유학할 공상도 말고 허는 일 없이 서울서 지내볼 생각도 다 집어 치우고 시골로 내려갑시다. 갑갑하고 고생은 되겠지만 농촌 밖에 우리의 일터도 없겠고 더구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촌여편네와 그네들의 자녀를 위해서 일생을 바칩시다.≪沈薰, 永遠의 微笑≫
▷양명(陽明)선생의 제자가 천하에 두루 퍼졌을 당시, 유독 심재(心齋) 왕간(王艮)이 가장 영령했다. 심재는 본래 주방에서 일하던 요리사로, 목불식정(目不識丁)의 무식꾼이었는데, 책 읽는 소리를 듣고 문득 스스로 깨우친 바가 있어, 강서(江西) 지방으로 가서 왕도당을 만나, 그와의 토론을 통해 자기가 깨우친 것의 실체를 알아보려 했다.≪ 爲黃安二上人三首≫
■ 목불인견 目不忍見
[눈 목/아니 불/참을 인/볼 견]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딱하거나 참혹한 상황.
[예문]
▷ 한국교회가 자기 교회 위주의 자립배경을 넘어서서 교회적으로나 교단적으로 개척교회 전도운동과 해외선교를 깊 이 인식하게 되는 1970년대초, 당시 외항선원들이 상륙하는 항만 주변에 술집과 윤락가만이 즐비했으며,그 타락상은 실로 목불인견이었다.--<김종석 선교사 홈페이지>
▷ 한때 코스닥 열풍이 노도처럼 거세게 몰아치며 너도나도 텔, 통, 컴 주식이면 무조건 사는 묻지마 투자가 기승을 부린 적이 있다. 현재
그 결과는 ‘목불인견’ 그 자체다. --<일간스포츠>
▷ 그러나 MBC는 기어이 13일 오후 구본홍 MBC 보도본부장, 손천수 라온건설 회장,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 박재규 경남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 등 주최·협찬사 대표들이 타이거 우즈와 라운딩을 함께 하는 모습을 무슨 대단한 화제인 것처럼 1시간 동안이나 편성하는 '목불인견'의 상황을 연출하기까지 했다.<2004 프레시안>
■ 목인석심 木人石心
[나무 목/사람 인/돌 석/마음 심]
☞의지가 굳어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
[출전] 『진서(晋書)』
[내용] 서진(西晋)때 사람인 하통은 학문이 깊고 다재다능한 데다 달변이어서 그가 살고 있는(강남)지방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주변사람들이 벼슬을 권했지만 세속적인 명리에 초연한 그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어느때 하통은 볼 일이 있어 수도인 낙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태위(太尉)라는 벼슬을 하고 있는 가충(賈充)이 하통을 찾아왔다. 가충은 원래 위나라의 대신이었는데 서진 건국에 이바지한 공적 때문에 한창 위세를 떨치고있는 사람이었다. 하통의 소문을 듣고 있던 가충은 그를 수하에 둠으로써 자기의 위세를 드높일 속셈으로 하통을 찾은 것이었다. 가충은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했지만 하통은 요지부동이었다.
어떠한 말로도 하통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안 가충은 다른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그는 이끌고 온 많은 군사를 집합시켜 대오를 가지런히 하고는 하통에게 사열을 하도록 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이 많은 군대는 당신이 지휘하게 되오. 그러면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위풍당당할 것인지를 상상해 보시오." 하통은 여전히 가충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요염한 무희들을 불러다가 하통의 앞에서 춤을 추고 교태를 부리게 했다.그리고 가충은 말했다. "어떻소.얼마나 아름다운 미인들이오.벼슬자리를 받아만 준다면 이들 미인은 모두 당신 것이 되오."
이런다고 유혹에 넘어갈 하통은 아니었다. 울화통이 터진 가충은 이렇게 말했다. "지위, 권세, 여색, 세 가지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놈은 세상에 없을 것이나 이 사람은 정말로 나무로 만든 사람이고 돌로 만든 마음(木人石心)이군." 가충은 관직을 권할 것을 포기하고, 하통은 회계로 돌아갔다. 그후의 일은 전해져 있지 않으나, 그 부동한 태도는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는 것이다.
■ 목탁 木鐸
[나무 목/큰 방울 탁]
☞불교에서 독경(讀經)이나 염불을 욀 때 사용하는 불구(佛具).세상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
[출전] 『論語』
[내용] 목탁(木鐸)이라면 누구나 사찰(寺刹)에서 사용하는 불구(佛具)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래되기 수 천년 전부터 목탁(木鐸)을 사용했다.옛날에는 달력이 귀했으므로 백성들이 절기(節氣)에 따른 농사일을 알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통치자는 그때 그때 해야 할 일을 백성들에게 알렸는데 이때 사용했던 것이 목탁(木鐸)이다.그 일을 맡은 관리는 매년 봄만 되면 커다란 방울을 치면서 시내(市內)를 돌아다녔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이 모여 들면 '봄이 왔으니 씨를 뿌려라'고 알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방울 속의 혀가 나무로 돼 있었으므로 목탁(木鐸)이라고 했다. 물론 쇠로 된 것도 목탁(木鐸)이라고 했는데 주로 군대내에서 명령을 하달할 때 사용하였다.후(後)에 불교가 전래되고 절기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서 목탁(木鐸)은 사찰에서만 사용되었는데 이 역시 식사(食事)나 염불 시간 등 공지 사항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어느 경우든 목탁(木鐸)은 어떤 사실을 널리 알리는데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후(後)에는 백성들을 교화(敎化), 인도하는 자(者)를 목탁(木鐸)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공자(孔子)였다.공자가 노(魯)나라에서 벼슬을 그만 두고 자기의 이상을 실현시킬 나라를 찾기 위해 유세(遊說) 여행을 하고 있던 무렵이다. 한번은 위(衛)나라에 갔는데, 의(儀)라고 하는 국경을 지키는 관원이 찾아왔다."군자께서 여기에 오시면 저는 어떤 분이라도 반드시 뵙습니다." 그가 공자를 뵙고 싶다고 청하므로 종자가 면회를 시켰다. 잠시 후 공자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관원이 나와 제자들에게 말했다."여러분은 문(文)이 상실되는 것을 왜 걱정하시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하늘은 장차 당신들의 선생님을 도(道)를 전하는 목탁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참고] 나무를 큰 방울 모양으로 깎아 그 중앙을 반쯤 자르고, 소리가 잘 울리도록 다시 그 속을 파서 비게 하여 조그마한 나무채로 두드리게 되어 있다. 본래는 수도승에 대하여 교훈을 주는 뜻에서 밤이고 낮이고 눈을 감는 일이 없는 물고기를 본뜬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하며, 그 같은 연유에서 목어(木魚)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몸통은 금속, 추(錘)는 나무로 된 커다란 요령(搖鈴)을 목탁이라고도 한다.
중국 노(魯)나라 때 문사(文事)나 또 새로운 법령을 발할 때에 목탁을 울려 사람을 모이게 한 데서, 사회의 주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계도한다는 뜻이 담겨졌다. 흔히 언론을 ‘사회의 목탁’이라고 하는 말이 이에서 비롯되었다.<두산백과>
■ 목후이관 沐猴而冠
[목욕할 목/ 원숭이 후/ 어조사 이/ 갓 관]
☞ 목욕한 원숭이가 갓을 씀. 사람 행세를 못함. 표면은 근사하게 꾸몄지만 속은 난폭하고 사려가 모자람
[출전] 『史記』
[유] 虎而冠
[내용] 홍문연(鴻門宴)을 통해 유방(劉邦)으로부터 진(秦)의 도읍 함양(咸陽 일명 關中)을 손에 넣은 항우(項羽)는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해 민심으로 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이 점은 유방(劉邦)이 예견한 터였다.항우(項羽)는 스스로 황폐하게 한 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팽성(彭城)으로의 천도(遷都)를 결심했다. 함양이라면 천혜의 요새로 패업(覇業)의 땅이었다.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생 (韓生)이 수 차례 간했지만 항우(項羽)는 화를 내면서 그를 멀리했다. 한생은 탄식하고 물러 나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원숭이를 목욕시켜 관을 씌운 꼴이군(沐후而冠)."그런데 이말을 항우(項羽)가 듣고 말았다. 무식했던 그는 무슨 뜻인줄 몰라 진평 (陳平)에게 물었다. "폐하를 흉보는 말인데 세가지 뜻이 있지요. 원숭이는 관을 써도 사람이 못된다는 것, 원숭이는 꾸준하지 못해 관을 쓰고 조바심을 낸다는 것, 그리고 원숭이는 사람이 아니므로 만지작거리다 의관을 찢어버리고 만다는 뜻입니다."격분한 항우(項羽)는 그를 끓는 기름가마에 던져 삶아 죽이고 말았다. 죽을 때 한생(韓生)이 말했다. "두고 보아라. 유방(劉邦)이 너를 멸하리라. 역시 초(楚)나라 사람들은 원숭이와 같아 관을 씌워도 소용이 없지." 결국 항우(項羽)는 함양(咸陽) 뿐만 아니라 천하(天下)를 몽땅 유방(劉邦) 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 몽진 蒙塵
[무릅쓸 몽/티끌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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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티끌을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나라에 난리가 있어 임금이 나라 밖으로 도주함.
[예문]
▷ 왜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은 북으로 몽진을 떠났다.
▷ 갑곶이라는 명칭은 고려 23대 고종이 몽고군의 침입을 당하여 강화도를 몽진 할 때 이곳이 대안과의 거리도 짧고 수심이 얕아서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이곳은 정묘호란(丁卯胡亂) 당시에도 인조임금이 건넜던 사실이 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에는 봉림대군이 수어했던 곳이기도 하며 병인양요(丙寅洋擾)때에는 격전을 치루었던 역사적 실전의 현장이기도 한곳이다--<김포스트리트>.
▷ 화석정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 고려 삼절로 추앙받는 야은 길재가 북녘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던 곳이며, 율곡의 5대조부가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백성과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 가는 선조의 몽진 길에 불 밝히기 위하여 불태워졌던 것을 그후 80여 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1673년(현종 14)에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정치가 박정희가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에는 이이가 8세 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네이버백과>
■ 묘항현령 猫項懸鈴
[고양이 묘/목 항/매달 현/방울 령]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실행하지 못할 일을 공연히 의논만 함
[동] 猫頭懸鈴묘두현령
[내용] 쥐들이 모여서 얘기하기를 "노적가리를 뚫고 쌀광 속에 깃들어 살면 살기가 윤택할텐데 다만 두려운 것은 오직 고양이 뿐이로다." 라고 하니 어떤 한 마리 쥐가 말하기를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면 아마도 소리를 듣고서 죽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쥐들이 기뻐 날뛰면서 말하기를 "자네 말이 옳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어떤 큰 쥐가 천천히 말하였다."옳기는 옳으나 고양이 목에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방울을 달 수 있겠는가?"하니 쥐들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원문] 群鼠 會話曰 "穿庾捿 生活可潤 但所 獨猫而已", 有一鼠 言曰, "猫項 若懸鈴子 庶得聞聲而遁死矣" 群鼠喜躍曰, "子言 是矣 吾何所 耶". 有大鼠 徐言曰,"是則是矣, 然 猫項 誰能爲我懸鈴耶", 群鼠 愕然 ≪고금소총古今笑叢≫
[예문]
▷ 고양이에게 괴롭힘을 당해 온 쥐들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합니다.제일 먼저 늙은 쥐가 말했습니다. "고양이가 오는 것을 누가 알려주면 좋을텐데."그러자 젊은 쥐가 나섰습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면 도망칠 수 있을거에요!"그 때 대장쥐가 말했습니다. "좋은 의견이야, 그런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그 말을 들은 쥐들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싶지 않았으니까요.<이솝우화>
▷ 정치권이 개혁을 서둘렀고, 연금 파탄의 비상 사태를 막기 위한 국민적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좀 더 내고 좀 덜 받는 것을 감내하겠다는 거다. 물론 이번 개정안도 모두가 꺼리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2006 매일경제>
■ 무골호인 無骨好人
[없을 무/뼈 골/좋을 호/사람 인]
☞뼈없이 좋은 사람. 지극히 순하고 남의 비위를 두루 맞추는 사람.
[예문] ▷ 1931년에 결국,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 회사가 파급시킨 광고 사진에서 전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해든 선드블롬의 예술적 재능 덕에, 산타클로스는 그때부터 인간적인 모습(보다 설득력 있고 훨씬 접근하기 쉬운), 불룩 나온 배, 호감이 가는 얼굴, 쾌활한 분위기와 무골호인 같은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의 35년 동안이나 코카콜라사는 전 세계의 신문과 잡지에, 그 다음에는 텔레비전에 이러한 산타클로스의 모습을 파급시켰다. 어린이들이 오늘날 산타클로스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은 아직도 이 모습이 강하게 젖어 있다--<프랑스 클럽 홈페이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단봉혼주의 제자에게 그아들이 피살되고 그의 신표인 '황말령'이 망가져서 무림인사로소 일대 치욕을 씻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 작룸이 끝날 때가지 이와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소일의 마음 속에 안붕거가 무골호인으로 낙인이 찍혔는지는 알 수없으나, 어쟀든 작품에 있어서 앞뒤의 내용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할 밖에<무협백과>에서.
■ 무궁무진 無窮無盡
[없을 무/다할 궁/없을 무/다할 진]
☞끝이 없고 다함이 없다.
[예문]
▷ 권주가 불로초로 술을 빚어 만년배(萬年配)에 가득 부어 비나이다. 남산수(南山壽)를.
약산 동대(藥山東臺) 어즈러진 바위 꽃을 꺾어 주(籌)를 노며 무궁무진 먹사이다.
권군 종일 명정취(勸君終日酩酊醉) 하자. 주부도 유령분상토(酒不到劉伶墳上土)니 아니 취 (醉)코 무엇하리.
백년을 가사인인수(可使人人壽)라도 우락(憂樂)을 중분미백년(中分未百年)을 살았을 때 잘 놉시다.
명사십리(明沙十里)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 마라. 명년 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려니와 가련하다 우리 인생.
▷ 장진주사--정철 -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이어매여 가나
유소보장의 만인이 울어에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 곧 가면
누른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제
뉘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위에 잿남이 휘파람 불 제야 뉘우친들 어이리
■ 무념무상 無念無想
[없을 무/생각 념/없을 무/생각 상]
☞일체 상념(想念)이 없는 담담한 마음의 상태.
[참고]--육조단경(불)에서
▷ 무념(無念)--무념은 북종의 "기신론"에 의하여 이념(離念)을 주장했다는 "대승무생(無生)방편 문"의 여러 사례에서 알 수 있다. 다만 "기신론"에는 무념이란 말도 있다. 그 제1장 '현시정의顯示正義 에서 "중생이 착실하게 무념을 관찰할 때는 곧 부처님 나라로 가는 지혜로 본다" 하였고 또 "무념을 이룩할 때는 곧 마음의 생주이멸(生住異滅)을 터득한다"고 했다. 남종 계열에서는 무념으로써 종지로 삼았고, 신회도 "단어"에서 진여는 무념의 본체이며, 그러므로 무념으로써 종지로 삼 는다.
무념이란 것은 견문각지(見聞覺知)를 갖추었다 해도 언제나 공적(空寂)하다"고 했다. 또 마명 (馬鳴)은 중생이 무념을 관찰하면 곧 부처님 지혜를 얻는다. 그러므로 지금 설명하는 반야 바라밀은 생멸문(門)에서 단박 진여문에 들 수 있다. 더구나 앞으로 비추고 뒤로 비추고, 멀리 보고 가까이 보고 할 필요가 없다. "도무지 이런 마음이 필요 없다" 하여, 암암리에 북종의 선법(禪法)을 비판하고 있다. "신회어록"에서는 신회가 수행자에게 말하는 가운데서, "무엇이 무념인가 하면, 이른바 유무를 생각하지 않고, 선악을 생각하지 않고, 끝이 있고 없고를 생각하지 않고, 한계가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보리를 생각하지 않고, 보리로써 생각으로 삼지 않고, 열반을 생각하지 않고, 열반을 생각으로 삼지 않는 것, 이로써 무념으로 본다"하였고, 또 "유무의 둘 다 던져버리고 중도 (中道)도 역시 없는 것이라야 이것이 곧 무념이다. 무념은 곧 일념(一念)이요, 일념은 곧 일체지(一切 知)요, 일체지는 곧 심심 반야바라밀이다. 바라밀은 곧 여래선(如來禪)이다"고 찬탄하고 있다. 이것은 무념을 종지로 하는 혜능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다
▷ 무상(無想)--모든 사물은 그 사물을 발생시킨 관계 조건의 변화에 따라 변천 소멸하는 것이며, 곡두와 같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물체의 드러난 모습을 인식하면서도 거기 사로잡히지 않는 것. "금강반야경"에, "무릇 모든 모습은 모두가 허망하다. 만약 모든 모습은 모습이 아니라고 볼 수 있을 때는 곧 여래를 볼 수 있다", 신회의 단어(壇語)에는 "일체 중생은 본디부터 무상이다. 지금 모습을 말하는 것은 모두가 망발된 마음이다. 마음이 무상이라면 이는 곧 부처님 마음이다,"고 하였다.
■ 무뢰한 無賴漢
[없을 무/의지할 뢰/사람 한]
☞성품이 막되어 예의와 염치를 모르며, 일정한 소속이나 직업이 없이 불량한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 ≒뇌자(賴子).
[예문]
▷ 사병들은 어느 틈에 온순하던 부하에서 폭도들이나 다름없는 일단의 광포한 무뢰한 들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홍성원, 육이오≫
▷ 측면 2칸의 단층 맛배지붕의 목조와가이며 지수문을 갖추고 있다. 사당에는 김은호 화백이 그린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었는데 1979년 어떤 무뢰한(無賴漢)에 의해 없어졌으니 부끄러운 일이다<진주스트리트 진주성 소개>
■ 무릉도원 武陵桃源
[굳셀 무/언덕 릉/복숭아 도/물줄기 원]
☞무릉의 도원. 지상의 낙원으로 인간의 도원경(桃源境).
[동] 桃源境(도원경). 桃花源(도화원) 仙境(선경) 別天地(별천지) 理想鄕(이상향)壺中天地(호중천지) : 호공(壺公)이란 사람이 항아리에서 살았는데 비장방(費長房)이 그 속을 보니 화려하고 술안주가 가득하였다는 이야기.
[출전] 『桃花源記』--陶淵明
[내용] :「진나라 태원때 무릉 사람이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는데 (하루는) 시내를 따라 (배를 저어) 가다가 길이 멀고 가까움을 잊었다가 문득 복사꽃이 핀 수풀을 만났다. 언덕을 끼고 수백보쯤의 넓이에 (온통 도화로) 한 그루의 잡목도 없으며 향기로운 풀은 곱고 아름다우며 떨어지는 꽃잎이 어지러이 날린다. 어부가 이를 매우 이상히 여겨 다시 앞으로 (배를 저어) 가서 그 끝까지 가보리라 하였더니 숲이 다하고 수원에서 문득 한 산을 얻으니, 산에는 작은 굴이 있어 마치 밝은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이에 배에서 내려 굴 입구를 따라 들어가니 처음에는 매우 좁아 겨우 (한) 사람 정도 통과할 수 있더니, 다시 수십 보를 나아가니 갑자기 앞이 탁 뜨여 밝아지면서, 토지는 평평하고 넓으며 집들이 잘 정돈되어 있고 기름진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 뽕나무와 대나무들이 있으며 전답의 (사이의) 길들은 사방으로 뻗어있고 닭과 개의 울음 소리가 도처에서 들리며 그 가운데에서 가고 오며 농사짓는 남녀의 의복이 모두 외부 사람들의 모습 같고, 노인과 어린 아이들이 모두 편안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원문] 晉太元中에 武陵人이 捕魚爲業하여 綠溪行에 忘路之遠近이라가 忽逢桃花林이라. 夾岸數百步에 中無雜樹하며 방초鮮美하고 落英이 ?紛이라. 漁人이 甚異之하여 復前行하며 欲窮其林하니 林盡水源에 便得一山하고 山有小口하여 戴?若有光이라. 便捨船從口入하니 初極狹하여 ?通人이러니 復行數十步하니 豁然開朗하여 土地平曠하고 屋舍儼然하며 有良田美池桑竹之屬하여 阡佰交通하고 鷄犬相聞하며 其中往來種作하는 男女衣着이 悉如外人하고 黃髮과 垂?가 竝怡然自樂이러라.
** 浦(잡을 포) 夾(낄 협) ?(어지러울 빈) 戴?(비슷할 방·불) ?(겨우 재) 豁(내뚫린골 활) 儼(엄전할 엄) 阡(밭뚝길 천) 悉(모두 실) ?(더벅머리 초) 怡(기쁠 이) 曠(넓을 광)
[예문] 武陵桃源이 있다 하여도 예듣고 못봤더니
붉은 노을 가득하니 이 진정 거기로다
이 몸이 또 어떠하뇨 武陵人인가 하노라 ---김득연.
■ 무면도강 無面渡江
[없을 무/얼굴 면/건널 도/강 강]
☞실패하고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다.
[동] 何面目見之
[내용] 《사기(史記)》의 〈항우열전(項羽列傳)〉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과 항우(項羽)는 천하의 패권을 놓고 서로 겨루게 되었다. 처음 항우의 우세로 전개되던 싸움은 장기화되면서 역전이 되었다. 해하(垓下)에서 펼친 운명을 건 한판 승부에서 패한 항우는 극한 상황으로 몰려 8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탈출을 시도하였는데, 동성에 이르자 겨우 28명의 기병만이 살아남았다. 이제 탈출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항우는 부하들을 보며 "나는 군대를 일으켜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번의 싸움을 했지만 단 한번도 패한 일이 없었다.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은 하늘이 나를 멸망시킨 것이지 내가 싸움에 약한 때문은 아니다. 그 증거를 보여주겠다"라고 말하고는 큰소리를 치며 말을 달려 한(漢)나라 대군 속으로 들어가니 한나라의 장병들은 좌우로 흩어졌다.
항우는 적장 한 명의 목을 베는 용맹을 보였으나 대세를 어쩌지 못하고 동쪽으로 도망가 우장강[烏江]에 이르렀다. 우장강에서 배를 준비하고 기다리던 정장(亭長)이 "'강동(江東)'이 좁다고는 하지만 땅이 사방 천리나 되며, 사람들은 수십 만이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곳도 왕노릇을 하기에 충분하니 제발 급히 강을 건너십시오. 한나라 군대가 들이닥치면 건널 수도 없게 됩니다"라고 말하며 강동으로 돌아가 재기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항우는 웃으면서 "하늘이 나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내 어찌 강을 건너가겠는가? 또한 나는 전에 강동의 8,000여 자제와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거니와, 지금은 한 사람도 돌아온 사람이 없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추대해 줄지라도 내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볼 수 있겠는가?[何面目見之]'"라고 말했다. 그리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여 31세의 한창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이 고사에서 '하면목견지'라는 말이 나왔으며, '실패하고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다'는 뜻의 '무면도강(無面渡江)'과 뜻이 통하는 말이다.<네이버백과>
■ 무병자구 無病自灸
[없을 무/질병 병/스스로 자/뜸 구]
☞질병이 없는데 스스로 뜸질을 한다. 불필요한 노력을 하여 정력을 낭비함
[속담]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
[출전] 『장자(莊子』잡편 '도척'
[내용] 공자의 친구 유하계에게는 도척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도척은 천하의 큰 도적이었다.그는 9천 명의 졸개를 거느리고 천하를 마음대로 오가며 제후들의 영토를 침범하여 포학한 짓을 자행하는가 하면, 남의 집에 구멍을 뚫어 문지도리를 떼어낸뒤 물건을 훔치고 남의 소와 말을 빼앗아가며 부녀자를 납치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이익을 탐하느라고 부모 형제를 돌보지 않고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그가 지나가면, 큰 나라에서는 성을 지키고 작은 나라는 농성하여 난을 피하는 형편이었다.
공자는 도척이 천하의 악당이 되어 잘못을 범하는 것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유하계의 수치로 생각하고 설득하러 찾아갔다. 그러나 도척은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칼자루를 만지며 공자를 꾸짖는 것이었다. 공자는 도척을 설득하는 말은 하지도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 문을 나왔다. 그는 수레에 올랐지만 고삐를 잡으려다 세 번이나 놓쳤고, 눈은 멍하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얼굴은 꺼진 잿빛 같았다. 수레 앞턱의 가로나무에 기댄 채 고개를 떨구고 숨도 내쉬지 못할 정도였다.
공자가 노나라의 동문 밖에 이르렀을 때 마침 유하계를 만났다. 유하계가 말했다. "요즘 며칠 동안 뵐 수가 없었는데 거마의 행색으로 보아 혹 도척을 만나러 갔던 게 아닙니까?" 공자는 하늘을 우러르며 한숨을 짓고 대답했다. "그렇소." 유하계가 말했다. "도척은 아마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대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죠." 공자는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말하자면 아프지도 않은데 스스로 뜸을 뜬 꼴이오.
부산하게 달려가서 호랑이의 머리를 건드리고 수염을 만지다가 하마터면 호랑이에게 먹힐 뻔했소."
■ 무불간섭 無不干涉
[없을 무/아니 불/범할 간/건널 섭]
☞남의 일에 나서서 참견하지 않음이 없다. 자기와는 상관도 없는 일에 공연히 간섭하고 참견하지 말라.
[속담] 남의 집 잔치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한다.(他人之宴에 曰梨曰枾라. 言不在其位 勿言其事)
[예문] 검찰의 관내 파출소 무기고 순찰 행위에 격분, 이를 검찰권을 확대해석한 월권행위로 규정하는 한편, 이런 검찰의 행위에 대해 "언젠가는 무불간섭 (無不干涉).무소불위 (無所不爲).무소불능 (無所不能).무불통지 (無不通知) 의 조직으로 비난받게 될 것" 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이었다.-<망치일보>에서
■ 무산지몽 巫山之夢
[무당 무/뫼 산/어조사 지/꿈 몽]
☞무산(巫山)의 꿈. 남녀간의 밀회(密會)나 정교(情交)
[동] 조운모우(朝雲暮雨). 천침석(薦枕席).
[유] 무산지운(巫山之雲). 무산지우(巫山之雨).
[출전] 『文選 』宋玉 高唐賦
[내용] 전국 시대, 초나라 양왕(襄王)의 선왕(先王)이 어느 날 고당관(高唐館)에서 노닐다가 피곤하여 낮잠을 잤다. 그러자 꿈속에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고운 목소리 로 말했다.
"소첩(小妾)은 무산에 사는 여인이온데 전하께오서 고당에 납시었는 말씀을 듣자옵고 침석(枕席:잠자리)을 받들고자 왔나이다." 왕은 기꺼이 그 여인과 운우지정(雲雨之情: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을 나누었다. 이윽고 그 여인은 이별을 고했다. "소첩은 앞으로도 무산 남쪽의 한 봉우리에 살며,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양대(陽臺) 아래 머물러 있을 것이옵니다."
여인이 홀연히 사라지자 왕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튿날 아침, 왕이 무산을 바라보니 과연 여인의 말대로 높은 봉우리에는 아침 햇살에 빛나는 아름다운 구름이 걸려 있었다. 왕은 그곳에 사당을 세우고 조운묘(朝雲廟)라고 이름지었다.
[원문] 昔者楚襄王與宋玉 游於雲夢之臺 望高唐之觀 其上獨有雲氣 兮直上 忽兮改容 須臾之間 變化無窮 王問玉曰 此何氣也 玉對曰 所謂朝雲者也 王曰 何謂朝雲 玉曰 昔者先王嘗游高唐 怠而晝寢 夢見一婦人 曰 妾巫山之女也 爲高唐之客 聞君游高唐 願薦枕席 王因幸之 去而辭曰 妾在巫山之陽 高丘之 旦爲朝雲 暮爲行雨 朝朝暮暮 陽臺之下 旦朝視之如言 故爲立廟號曰朝雲
■ 무소부지 無所不知
[없을 무/바 소/아니 불/알 지]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 매우 박학다식(博學多識)함.
[동] 無不通知
[참고] 무소부지 無所不至 : 이르지 아니한 데가 없음.= 無所不爲
[예문] 석재 서병오 선생님은 학자로 벼슬을 버리고 지,당,송,명,청 시대의 명첩을 두루방임하고 해,행,초에서 전,예에 이르는 각체를 닦고 사군자 문인화 기명절지와 수묵산수에도 능해서 무소부지한 대가 였고 그의 문하에서 학습으로 닦은 죽농 서동균 선생남 또한 발휘하셨다. 같은 향리에서 영향을 얻어서 기명절지에도 관심있게 그리게 되었다.
■ 무신불립 無信不立
[없을 무/믿을 신/아니 불/설 립]
☞신의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르는 말.
[내용1]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족병(足兵), 족식(足食) , 민신(民信)이라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안보와 경제, 국민과의 신의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이제 자공이 그 중에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이냐고 하자 족병(足兵)이라 했고, 또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이냐 묻자 족식(足食) 이라 답했다 한다. 그러면서 민신(民信)은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무신불립(無信不立), 백성과의 신의가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논어(論語)》
[내용2]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북해(北海) 태수를 지낸 공융(孔融:153∼208)은 조조(曹操:155∼220)의 공격을 받은 서주(徐州) 자사 도겸(陶謙)을 구해주려고 자신의 군사와 함께 유비(劉備:161∼223)에게 공손찬(公孫瓚:?∼199)의 군사를 빌려서 도겸을 도와주게 하였다. 공융은 군사를 가지면 유비의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비에게 신의를 잃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그러자 유비는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실린 공자(孔子:BC 552∼BC 479)의 말에 따라 "성인은 '예부터 내려오면서 누구든지 죽지만 사람은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고 하였습니다. 유비는 군대를 빌릴지라도 이곳으로 꼭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공융에게 말하였다고 전해진다.믿음과 의리가 없으면 개인이나 국가가 존립하기 어려우므로 신의를 지켜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 무용지물 無用之物
[없을 무/쓸 용/어조사 지/만물 물]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나 사람.≒부췌附贅, 군더더기
[예문]
▷ 빈둥빈둥 놀면서 밥만 축내는 사람은 우리 사회의 무용지물이야.
▷ 교인들에게 낭패를 당한 김 군수로서는 큰맘 먹고 수리한 감옥이 자칫 무용지물이 될 판인지라 꿩 대신 닭이라고 교인 대신 만만한 적객 몇을 골라 집어넣을 꾀를 낼 만도 했다.≪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 무위도식 無爲徒食
[없을 무/할 위/다만 도/먹을 식]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유식(遊食)
[예문]
▷ 무위도식을 일삼다
▷ 남편이란 자는 아내가 벌어 오는 돈으로 무위도식이나 하며 지낸다.
▷ 그 직장을 그만둔 뒤로 그는 무위도식하며 세월을 보냈다.
▷ 나는 운수(雲水)를 벗 삼아 팔도강산을 헤매다가 나이만 먹어 한이 많네만, 자네는 지금 무위도식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혈기를 그대로 썩이는 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야.≪유주현, 대한 제국≫
▷소하는 중국 전한조(前漢朝)의 고조(高祖)유방(劉邦)의 재상. 한신(韓信)·장량(張良)·조참(曹參)등과 함께 고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의 한 사람이다. 진(秦)나라의 하급관리로 있으면서 일찍이 한고조 유방이 무위도식할 때부터 접촉을 가졌다.
■ 무위이치 無爲而治
[없을 무/할 위/말이을 이/다스릴 치]
☞함이 없이 다스려 짐, 인위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 다스려 짐을
[동] 무위지치(無爲之治)
[출전] 『논어(論語) 』 위령공편(衛靈公篇)
[내용]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잘 다스렸던 사람은 아마도 요임금일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을 했던가?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공자의 이 말은 순임금이 도덕적 모범이 되어 사람들이 저절로 따르게 되어 요즘처럼 다스리기 위한 각종 법제를 정하여 규제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이 말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말한 도가(道家)의 말과는 차이가 있다.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인간의 모든 행위(임금이 다스리는 행위)를 부정하고 오로지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나가는 것을 말하는데 유가의 무위이치(無爲而治)는 백성을 다스린다는 기본 전제하에 도덕적 완성인이 군주가 되면 다스리지 않아도 백성들이 저절로 다스려 진다는 의미이다.
[원문]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 무위이화 無爲而化
[없을 무/할 위/말이을 이/화할 화]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변화하여 잘 이루어짐.성인의 덕이 크면 클수록 백성들이 스스로 따라나서 잘 감화됨.
[출전] 『老子 』
[내용] 천하에는 행해서는 안 된다고 정해진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백성은 가난해 진다. 백성들에게 편리한 문명의 도구가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나라는 혼란해진다.
인간은 지혜나 기술이 향상되면 될수록 괴상한 것들이 나타나고 법률이 정밀해지면 해질수록 죄인은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말한다.
"내가 하는 것이 없으면 백성은 스스로 和하고,
내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백성은 스스로 바르게 된다.
내가 일 없이 있으면 백성은 저절로 잘 살게 되고,
내가 욕심이 없으면 백성은 저절로 소박해진다."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또 노자(老子)는 말한다."'도(道)'는 언제나 무위(無爲)이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일체를 하고 있다. (道常無爲而 無不爲)"고.
老子의 말은 계속된다."후왕(侯王)이 만약 능히 이 '도(道)'를 잘 지키면 만물은 자연히 화(化)하려 한다.(侯王若 能守之萬物將自化)"고.
■ 무장공자 無腸公子
[없을 무/창자 장/공변될,존칭 공/아들,존칭 자]
☞담력이나 기개가 없는 사람을 비웃어 하는 말. 게의 별칭.
[참고] 게는 한자어로 "횡행공자" 또는 "무장공자" 라고도 불리며, 해조문(도자기의 게발자국 같은 무늬), 해행문자(옆으로 쓰는 글씨) 같은 것으로 우리 주변에 그 자취를 보이며, "게눈 감추듯 한다" "게 잡아 물에 넣는다", "게 거품 문다" 같은 말로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예문]
▷ 이 때 제일석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물을 조금 마시고 연설을 시작한다. 내용은 [반포의 효(反哺之孝)]를 예로 들면서 인간을 비난한다. 그리고 제이석의 여우가 등단하여 기생이 시조를 부르려고 목을 가다듬는 듯한 간사한 목소리로[호가호위(狐假虎威)]를 들면서 인간의 간사함을 성토한다. 제삼석의 개구리는 [정와어해(井蛙語海)]의 예를 들어 분수를 지킬 줄 모르고 잘난 척하는 인간을, 제사석의 벌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예를 들어 인간의 이중성을, 제오석의 게는 [무장공자(無腸公子)]의 예로써 외세에 의존하려는 인간의 태도를 비난한다.--『금수회의록』
▷<윤우당作>--구한말 한학자 : 뜰에 가득 차가운 비 내려 물가에 온통 가을인데
제 땅 얻어 종횡으로 마음껏 다니누나
창자 없는 게가 참으로 부럽도다
한평생 창자 끊는 시름을 모른다네.
■ 무지몽매 無知蒙昧
[없을 무/알 지/어릴 몽/어두울 매]
☞아는 것이 없이 어리석음.
[예문]
▷ 아기가 너무 약하고 아기 엄마는 너무 무지몽매해 아기가 제대로 자랄 것 같지가 않아 걱정스럽다. 무지몽매하다
▷ 무지몽매한 인민들을 영원히 노예로 묶어 두고자 날조해 낸 거짓말….≪최명희, 혼불≫ 날조하다
▷ 그날 그 극장의 관중들은 소학생도 아니요,무지몽매한 촌사람들도 아니다.≪김소운, 일본의 두 얼굴≫ 촌사람
▷ 그것을 글자 그대로 맹신함은 인간이 무지몽매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일 때에 한한 일일 것이다.≪유치환, 나는 고독하지 않다≫ 맹신하다
■ 무하유지향 無何有之鄕
[없을 무/어찌 하/있을 유/어조사 지/고향 향]
☞ 인위적인 그 무엇도 있지 않은 곳으로 풀이되며 장자가 말하는 이상향을 뜻함
[출전] 『장자 』
[내용] 이 말은 장자 소요유, 지북유, 응제왕편에 나오는 말이다.응제왕편에 보면 천근이 은양에서 노닐며 요수가에 이르렀을 때 무명인(無名人)을 만나 이렇게 물었다.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고자 합니다" 무명인이 말하였다."가거라. 너는 비천한 사람이다. 어찌 그런 불쾌한 질문을 하느냐? 나는 장차 조물주와 더불어 벗이 되어 세상이 싫어지면 저 하늘을 나는 새를 타고 육극의 밖으로 나아가 무하유지향에 노닐면서 광야에 머물고자 한다. 너는 어찌 천하를 다스리는 일로써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원문] 소요유(逍遙遊) 지북유(知北遊) 응제왕(應帝王) 天根遊於殷陽, 至蓼水之上 適遭無名人而問焉 曰 請問爲天下 無名氏曰 去 汝鄙人也 何問之不豫也 予方將與造物者爲人 厭 則又乘夫莽 之鳥 以出六極之外 而 遊無何有之鄕 以處壙垠之野 汝又何 以治天下感予之心爲
■ 묵묵부답 默默不答
[말없을 묵/대답할 답]
☞입을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음.
[예문]
▷ 뒤실 어른은 허리춤에서 뽑아낸 곰방대에 쌈지 담배를 비벼 넣으면서도 두꺼운 입술을 꾹 다문 채 묵묵부답이다.≪김춘복, 쌈짓골≫
▷ 법을 잘 아는 정치인의 묵비권 행사는 아무래도 떳떳하지 못했다. 보통사람도 명예훼손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권리 이전에 사회적 책임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발언과 폭로에 대해선 더욱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한겨레>
■ 묵자비염 墨子悲染
[먹 묵/존칭 자/슬플 비/물들일 염]
☞묵자가 물들이는 것을 슬퍼한다는 말로, 사람들은 평소의 습관에 따라 그 성품과 인생의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는 뜻.
[동] 묵자읍사 墨子泣絲 묵비사염 墨悲絲染
[출전] 『묵자(墨子)』소염(所染)편
[내용] 어느 날 묵자는 실을 물들이는 사람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였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란색,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란색이 되는구나. 이렇게 물감에 따라 실의 색깔도 변하여 매번 다른 색깔을 만드니 물들이는 일이란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다. 사람이나 나라도 이와 같아 물들이는 방법에 따라 일어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옛날 순(舜)임금은 어진 신하 허유(許由)와 백양(伯陽)의 착함에 물들어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렸고, 우(禹)임금은 고요(皐燿)와 백익(伯益)의 가르침, 은(殷)의 탕왕(湯王)은 이윤(伊尹)과 중훼(仲迂)의 가르침, 주(周)의 무왕(武王)은 태공망(太公望)과 주공단(周公旦)의 가르침에 물들어 천하의 제왕이 되었으며 그 공명이 천지를 뒤덮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천하에서 인의를 행한 임금을 꼽으라면 반드시 이들을 들어 말한다.
그러나 하(夏)의 걸왕(桀王)은 간신 추치(推琇)의 사악함에 물들어 폭군이 되었고,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숭후(崇候), 오래(惡來)의 사악함, 주나라 여왕(勵王)은 괵공 장보(長父)와 영이종(榮夷終)의 사악함, 유왕(幽王)은 부공이(傅公夷)와 채공곡(蔡公穀)의 사악함에 물들어 음탕하고 잔학무도한 짓을 하다가 결국은 나라를 잃고 자기 목숨마저 끊는 치욕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천하에 불의를 행하여 가장 악명 높은 임금을 꼽으라면 반드시 이들을 들어 말한다. 평소에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계속되면 습관화하여 생각과 태도가 길들여지는 것이므로 나쁜 습관이 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말이다.
[원문] 子墨子見染絲者 而歎曰 染於蒼則蒼 染於黃則黃 所入者變 其色亦變 五入必而已則 其五色矣 故染不可不愼也 非獨染絲然也 國亦有染.
■ 묵적지수 墨翟之守
[墨守][먹 묵/꿩 적/어조사 지/지킬 수]
☞굳건히 성을 지킴.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굳이 지킴. 묵자가 성을 지키는데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너무 완고하여 변통할 줄 모르거나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준] 墨守묵수
[유] 守柱待兎수주대토 / 미생지신尾生之信 / 膠柱鼓瑟교주고슬 /墨城之守묵성지수 / 刻舟求劍각주구검
[출전] 『묵자』 공수편
[내용] 묵적이란 이가 제나라에 있을 때 초나라가 공수반이 개발한 신무기인 사다리를 사용하여 송나라를 공격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 묵자는 곧 초나라로 가 '공수반'을 만나 전쟁을 만류했다.송나라는 좁은 땅에 인구가 많은데, 땅이 넓은 초나라가 굳이 침략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통렬히 공수반을 공박하고 초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부강한 나라가 빈곤한 나라를 치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있으면서 이웃집의 하나밖에 없는 헌 옷을 훔치려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논지로 초왕을 설득한 것이다. 이에 묵자는 모의(模擬)로 성(城)을 만들어 공수반과 일종의 전쟁게임을 했는데, 공수반은 열 가지 책략으로 성을 공격했으나 묵자는 끄떡도 안하고 아홉번이나 물리쳤다. 결국 초왕은 묵자에게 송을 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원문] 公輸盤九設攻城之機變. 子墨子九距之. 公輸盤之攻械盡.子墨子之守 有餘
[참고] 戰國時代(전국시대) 때의 일이다. 楚(초)의 荊王(형왕)이 公輸般(공수반)이 만든 특수 사다리를 사용하여 宋(송)을 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기계는 전문적으로 城(성)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였다. 墨子는 즉시 荊王을 만나 만류했다. 그는 兼愛說(겸애설)을 주장한 사람으로 열렬한 反戰論者(반전론자)였다.
>‘전쟁이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섰을 때에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비웃음만 사게 되지요. 제가 보기에 楚가 宋을 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荊王은 宋을 치지는 않았지만 墨子의 말은 믿지 않았다. 그러자 墨子가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城을 지킬테니 公輸般으로 하여금 치도록 해 보십시요.’ 과연 公輸般이 아홉번이나 공략했지만 끝내 墨子가 지키는 城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번에는 公輸般이 城을 지키도록 했는데 墨子는 아홉번이나 함락시켰다. 荊王은 그제서야 公輸般의 사다리가 缺點(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墨子가 城을 지킨 고사는 일약 유명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墨子가 城을 굳게 지킨 것을 ‘墨守’라고 했는데 전통이나 我執(아집), 또는 偏見(편견)에 사로잡혀 조금도 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도 墨守라고 했다. 일종의 固守(고수), 死守(사수)인 셈이다. --<문화가 흐르는 한자>
[예문]
▷ 새로운 민족 문화의 창조가 단순한 과거의 묵수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외래문화의 모방도 아닐 것이다.
▷ 자기 의견만을 묵수하다
▷ 구습을 묵수하다.
■ 문경지교 刎頸之交
[목벨 문/목 경/어조사 지/사길 교]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벗.
[동] 管鮑之交(관포지교) : 齊(제)나라 재상 管仲과 鮑叔牙의 사귐. 매우 친한 사이의 사귐. /金蘭之交(금란지교) : 쇠를 끊을 만큼 견고하고 향기로운 난초와 같은 우정. /芝蘭之交(지란지교) : 지초와 난초의 사귐. 맑고도 고상한 사귐. /竹馬故友(죽마고우) :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친구.
[출전] 『史記』 廉頗藺相如傳)
[내용] : 전국시대 趙의 혜문왕(惠文王) 때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큰 공을 세웠지만 환관 무현(武賢)의 식객에 불과했던 인상여를 경대부(卿大夫)에 임명하자 염파는 불만이 대단하였다. 그래서 인상여를 만나면 망신을 주리라 생각하였다.
그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하니 부하들이“왜 그렇게 염장군을 두려워 합니까?”라고 물으니 인상여가“秦나라가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와 염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둘이 서로 헐뜯고 싸운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염파는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염파가 옷을 벗어 살을 드러내고 곤장을 지고 인상여의 집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하기를“비천한 사람이 장군의 너그러움이 이와 같음을 알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인상여와 염파가 문경지우가 되었다.
[참고] 부형청죄 負荊請罪 : 잘못을 저질렀을 때 정중하게 남에게 사죄하는 뜻
[원문] 廉頗가 肉袒負荊하고 至門하여 謝罪曰 鄙賤之人이 不知將軍寬之如此라. 卒相與驩이 爲刎頸之友하다.( ** 藺(고풀 린) 廉(청렴할 렴) 頗(치우칠 파) 袒(웃통벗을 단) 荊(곤장 형) 謝(사례할 사) 鄙(더러울 비) 寬(너그러울 관) 驩(기뻐할 환).
■ 문과식비 文過飾非
[꾸밀 문/허물 과/꾸밀 식/아닐 비]
☞허물도 꾸미고 잘못도 꾸민다.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뉘우침도 없이 숨길 뿐 아니라 도리어 외면하고 도리어 잘난 체함.
■ 문방사우 文房四友
[글월 문/방 방/넉 사/벗 우]
☞글방의 네가지 벗. 종이, 붓, 벼루, 먹.(紙筆墨硯)=문방사보(文房四寶) ·문방사후(文房四侯)
[내용] 문방이란 문한을 다루는 곳 즉 ,문사들의 방이란 뜻이다. 문방에 없어서는 안 될 종이, 붓, 먹, 벼루를 문방의 사우라 하며 혹은 문방사후, 사보라고도 한다. 문방사후란 것은 사우를 의인화시켜 각각 벼슬이름을 붙여 준 것이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문인의 서재를 문방이라 하고 수업의 장으로 존중해왔으며 문방구를 애완 하는 역사는 한·위·진으로 더듬어 올라갈 수 있으나, 남당의 이욱이 만들게 한 이정규묵·남당관연··오백현의 붓은 남당4보라 부르고 문방구 역사의 기초를 이루었다.
송대에 이르러 이런 문방구 애완의 풍조가 더욱 고조되고, 종류도 연적·필세·도장 등 45종에 이른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승려이며 화가인 담징이 이미 610년일본에 건너가 채색종이·먹의 제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어 문방의 역사를 말해준다.
붓: 짐승의 털을 추려서 모아 원추형으로 만들어 죽관(竹管) 또는 목축(木軸)에 고정시킨 것으로 호(毫)의 끝을 봉(鋒), 호의 끝부분 반을 전호(前毫), 그 필두(筆頭)까지의 짧은 털은 부호(副毫)라 한다. 털로 된 모필 이외에도 죽필(竹筆)·고필(藁筆)·갈필(葛筆) 등 특수한 것이 있다.호는 주로 토끼털(紫毫라고도 함), 양털을 비롯하여 이리·너구리·사슴·족제비·말·고양이·노루등의 털과 쥐수염·닭털·태발(胎髮) 등으로도 붓을 맨다. 털이 부드러운 붓을 유호필(柔毫筆), 탄력이 큰 털로 맨 붓을 강호필(剛毫筆)이라 하고 유호에 강호심(剛毫)을 박은 것을 겸호필(兼毫筆)이라 한다. 또 털의 길이가 긴 것을 장봉(長鋒), 짧은 것을 단봉(短鋒), 보통의 것을 중봉(中鋒)이라 한다. 토끼털은 중추(仲秋) 무렵의 것을 상질로 치고, 사슴털은 여름 것을 취한다. 필관은 대개 대나무를 쓰지만 나무·골각·보옥·금은·도자 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먹:먹[墨]의 시초는 중국의 한대(漢代) 초라는 정설이 있다. 붓은 진대(秦代)의 몽염(蒙恬)이, 종이는 한대의 채륜(蔡倫)이 발명하였다고 하나, 먹의 발명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붓을 쓰기 시작한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발명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먹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문자를 골편(骨片)이나 금석(金石)에 새겼다. 이를 갑골시대(甲骨時代)·금석시대라 한다. 그 후 인지(人智)와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문자의 사용범위가 넓어지고, 갑골문이나 금석문만으로는 기록하기가 어려워지자 대나무 조각이나 나뭇조각 또는 천 등에 문자를 쓰게 되었다. 이때를 죽간시대(竹簡時代)라 한다. 당시 죽간에 쓰던 것은 붓이 아닌 죽정(竹挺)이란 것으로 옻[漆]을 묻혀 썼다. 그래서 그 문자의 획이 마치 올챙이 모양과 같다 하여 죽첩과두문자(竹牒??文字)라고 하였다. 공자나 맹자가 쓴 글씨도 모두 이 죽간칠서(竹簡漆書)였다.
견백(絹帛)이란 천(명주)은 종이보다 다소 먼저 발명되었다. 죽간시대에 이미 명주에 글씨를 썼으며, 이 글씨는 붉은 단서(丹書:붉은 광석이나 돌가루를 반죽하여 그것을 붓에 묻혀 쓴 글씨) 아니면 검은 묵서(墨書)였다. 이때 묵서의 원료는 자연산 석날(石靭)이라는 일종의 광물이었다. 석날이란 오늘날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黑鉛)의 일종인 듯하며, 거기에 옻을 섞어서 썼던 모양이다. 그 후 문화가 발달됨에 따라 점차 그을음, 즉 연매(煙煤)를 옻 대신 썼다. 이어서 아교풀과 섞어 쓰게 되면서 드디어 제묵(製墨)의 단계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한(前漢)시대에도 오늘날과 같은 먹은 만들지 못한 듯, 당시에 쓰였던 얇고 편편한 벼루와 마묵구(磨墨具)가 낙랑채협총(樂浪彩瑩塚), 그 밖의 한대(漢代)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25∼220년 후한(後漢)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오늘과 같은 먹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종이의 발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송연묵(松煙墨)을 생산하였고, 유연묵(油煙墨)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오대십국(五代十國)시대에 이르러서다. 당시 남당(南唐)의 후주(後主)가 먹의 사용을 장려하여 이정규(李廷珪)와 같은 유명한 묵공(墨工)이 나왔고, 그 후 송(宋)·원(元)·명(明)·청(淸) 등으로 이어져 오면서 많은 묵공이 배출되고 일품(逸品)이 생산되었다.
한국의 제묵 연혁을 살펴보면, 고대부터 먹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위만·낙랑시대에 중국의 것을 본받은 것이 사실인 듯하며, 신라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정품(精品)의 먹이 생산되었다. 신라의 양가(楊家)·무가(武家)의 먹은 모두 송연묵으로서 그 품격(品格)이나 질이 매우 좋았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조선묵(朝鮮墨)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일본에서도 먹은 매우 귀하게 여겼으며, 그들이 먹을 처음으로 만든 것은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제지법과 제묵법을 610년에 전해준 데서 비롯되었다. 일본인 자신들도 이 사실을 시인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신라의 먹을 수입하여 매우 소중히 여겼다 한다.
종이:짐승의 가죽을 부드럽게 하여 만든 양피지(羊皮紙:parchment), 대나무나 나무를 얇게 깎아서 만든 것과 같은 것들은 모양과 용도가 같아도 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제2의 종이'나 '제3의 종이'라고 하는 레이온·합성섬유 등을 원료로 하여 종이 모양으로 만든 것들도, 종이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종이관계 국제회의에서 여러 차례 논의한 바, 그것들을 종이의 범주 안에 넣어 취급은 하지만 종이의 정의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식물의 섬유를 원료로 한 것'으로 결정하였다.
종이는 크게 한지(韓紙)와 양지(洋紙)로 나누며, 한지는 수록지(手질紙)와 기계지(機械紙)로, 양지는 종이(좁은 뜻의)와 판지(板紙)로 다시 나눈다.양지의 주된 원료는 목재펄프이며, 한지는 닥·삼·마 등의 인피섬유(靭皮纖維)를 원료로 하여 사람의 힘으로 제조되었으나, 근래에 와서 목재펄프를 섞어서 기계를 사용하여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양지와 한지의 구별은 점차 애매하게 되어 가며, 제품의 외관으로 구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지의 종이는 섬유를 단층으로 조성하여 만들며, 판지는 지층을 여러 겹을 조성하여 물을 머금은 상태에서 압착함으로써 섬유가 서로 엉겨 붙도록 하여 만든다. 그러나 종이의 두꺼운 것과 판지를 외관상으로 정확하게 구별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종이의 두께는 g/㎡로 표시하는데, 이는 1×1m짜리를 저울에 달았을 때의 결과값을 말하며, 거래 단위는 관례상 t(M/T)을 사용한다.
벼루:간다는 뜻에서 '硏'자를 동의자로 쓴다. 대개는 돌로 만들지만 와연(瓦硯), 도연(陶硯)도 있고 옥·유리·비취·수정 등 보석류라든가 금·은·동·철·목(木)·죽(竹) 등으로도 만든다. 형태는 직사각형·사각형·원형·타원형·풍자(風字)형 등이 있다. 물론 다른 의장(意匠)으로 만들어진 것도 더러 있다. 먹을 가는 부분을 연당(硯堂), 또는 묵도(墨道)라 하고 갈려진 먹물, 즉, 묵즙이 모이도록 된 오목한 곳을 연지(硯池), 또는 연홍(硯泓), 연해(硯海)라 한다.벼루가 구비하여야 할 첫째 조건으로는 먹이 잘 갈리고 고유의 묵색이 잘 나타나야 한다.
연당의 표면에는 숫돌과 같은 꺼끌꺼끌한 미세한 봉망(鋒芒)이 있어 여기에 물을 붓고 먹을 마찰시킴으로써 먹물이 생긴다. 따라서 봉망의 강도가 알맞아야 한다. 봉망이 약하면 먹이 잘 갈리지 않고 반대로 강하기만 하면 잘 갈리기는 하나 먹빛이 좋지 않다. 그래서 벼루는 실용의 기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좋은 재질의 것을 첫째 요건으로 하지만 구석기시대부터 중국인의 돌에 대한 강한 애착은 벼룻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다만 먹을 가는 도구라는 차원을 넘어 돌의 빛깔이라든가 무늬의 아름다움을 취하고 나아가 연면(硯面)을 고도의 미적 의장으로 조각 장식하여 문방사우의 하나로서 감상의 대상으로 소중히 여겨왔다. <네이버백과>
[참고] 歲寒三友[세한삼우]--松,竹,梅[소나무,대나무,매화]
北窓三友[북창삼우]--거문고,술,시
■ 문외한 門外漢
[문 문/바깥 외/사내 한]
☞ 어떤 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거나 관계가 없는 사람.
[예문]▷문외한 눈에는 똑같은 것 같아도 전문가들 보기엔 천양지차가 있지.≪윤흥길, 제식 훈련 변천 약사≫
▷ 조직 검사를 해 보자는 것이다. 그 방면에 문외한인 나는 조직 검사가 어떤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었다.≪법정, 무소유≫
▷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이 문제를 나 같은 문외한은 감히 언급할 수조차 없다.≪한비야-지도밖으로 행군하라≫
▷ 우리들 가운데 누구와도 관계가 없는 사람이, 그리고 (따지자면 말입니다만,) 우리 가족에겐 문외한인 사람이 그런 시기에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끼게 되었는지 제가 얼마나 궁금해하는가를요.≪제인 오스틴-오만과 편견≫
■ 문일지십 聞一知十
[들을 문/한 일/알 지/열 십]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안다. 매우 총명함.
[반] 得一忘十(득일망십)
[출전] 『論語』 公治長篇 출처 :한자뱅크
[내용] 공자의 제자가 3천명이나 되었고 후세에 이름을 남긴 제자가 72명이나 되지만 당시 재주로는 자공을 첫째로 꼽고 있었다. 실상 안회는 자공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나은 편이었지만, 공자가 말했듯이 그는 그러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는 바보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孔子는 子貢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여 물었다.“자네와 안회는 누가 더 나을 것같이 생각되는가?”하니,“소생이 어찌 감히 안회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듣고서 열을 알지만 소생은 하나를 듣고서 겨우 둘을 아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확실히 자네는 회를 따를 수 없다. 따를 수 없는 것은 자네만이 아니라 나도 회를 따르지 못하는 점이 있다네.”라고 하였다.공자는 자공의 솔직한 대답에 만족했다. 역시 자공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었다.
■ 문전성시 門前成市
[문 문/앞 전/이룰 성/장 시]
☞문 앞에서 시장이 이루어진다. 권세가나 부자집 문앞은 방문객들로 붐빈다.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집 문 앞이 시장을 이루다시피 함.
[동] 門前若市(문전약시) : 문 앞이 시장과 같다./ 門庭若市(문정약시) : 집안의 뜰이 시장과 같다.
[반] 門前雀羅(문전작라) : 문 앞이 새 그물을 칠 정도로 한적하다.
[출전] 『漢書』 孫寶傳,鄭崇傳
[내용1] : 漢나라 애제(哀帝)는 약관(弱冠)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외척이 정권을 쥐고 있어 꼭두각시에 불과하였지만 그에게는 정숭(鄭崇)이라는 어진 신하가 있었다. 처음엔 정숭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외척들의 저항이 점점 거세지자 귀찮아 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그 틈에 간신들이 기회를 잡고 그를 모함하니,「임금이 정숭을 꾸짖기를 그대의 집은 시장과 같다고 하니 어찌하여 짐(朕)과의 관계를 금하여 끊으려 하는가? 하니 정숭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의 집은 시장과 같으나 신의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上責崇曰 君門如市이라하니 何以欲禁切主上이리오하니 崇對曰 臣門如市이나 臣心如水이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애제는 정숭의 말을 믿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결국 옥사하고 말았다.
[내용2] 전국시대, 제(齊)에 추기(鄒忌)라는 호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추기는 거울을 보고 생각했다. "나는, 미남자로 유명한 서공(徐公)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다. "나와 서공과 어느 쪽이 미남자인가?" 아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틀림없이 당신 쪽이 더 잘 생겼습니다." 아내의 말은 신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 추기는 첩에게도 꼭같이 물었다. 첩은, "물론 당신이 더 잘 생겼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음날, 친구가 찾아왔기에 추기는 친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추기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온 그 친구가 대답했다. "서공 따위는 자네에게 미치지 못하네. 정말이네!" 친구의 칭찬의 말에도 추기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서공이 추기의 집을 방문했다. 추기는 서공을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보고, 또 뚫어지도록 서공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내 쪽이 떨어진다." 서공이 돌아간 후에, 추기는 자신과 서공과를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려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자신이 서공보다 못생겼다고 생각되었다.
그 날 밤, 그는 생각했다. "왜 모두 내가 더 잘생겼다고 말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추기는 깨달았다. "아내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첩은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친구는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였다."라고. 자신이 이 지경이라면, 왕은 더 많은 아부의 소리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기는 위왕(威王)을 알현하여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칭찬하는 말보다, 비판하고 충고하는 말이야말로 들을 가치가 있다고 진언했다.
위왕은 그 말을 옳게 여기어 즉시 공포했다. "관리와 백성을 막론하고, 나에게 직간(直諫)하는 자에게는 상등(上等)의, 상서(上書)하여 간하는 자에게는 중등(中等)의, 마을에서 비판하는 자에게는 하등(下等)의 상을 준다." 예상대로, 왕에게 간언하려고 온 자가 줄을 이었기 때문에, 왕궁의 뜰은 저자처럼 사람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물론, 상서도 쇄도하였고, 마을에서도 왕을 비판하는 소리로 떠들썩하게 되었다. 왕은 그들의 비판을 받아들여서 정치를 개혁해 갔다.
수 개월이 지났다. 비판자는 두드러지게 줄어들었고, 1년 후에는 비판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비판의 씨앗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위왕은 이런 노력으로 제나라의 힘을 강하게 하였다. 주위의 여러나라들이 모 두 제나라를 존경하여 사자를 파견했다. 역사가는 이것을 논평하여 말했다. "위왕은 군사를 사용하지 않고 승리를 얻었다."
[원문] 上責崇曰 君門如市人 何以欲禁切主上 崇對曰 臣門如市 臣心如水 願得考覆
[예문]
▷ 당장 소문이 인근 마을에 쫙 퍼져 일부러 구경 오는 사람들로 하루 종일 문전성시를 이루었다.≪현기영, 변방에 우짖는 새≫
▷ 강남과 판교신도시를 잇는 시흥동 일대의 땅은 가격을 묻지 않고 사겠다는 사람들로 부동산마다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였다.<2006 이코노믹리뷰>
▷ 동교동계 중진의 집을 찾았던 한 여권 인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청와대 밖의 권부(權府)답게 예상대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지만, 정작 놀란 것은 거기서 만난 한 정치인 때문이었다.<2006 경향신문>
■ 문전작라 門前雀羅
[문 문/앞 전/참새 작/벌일 라]
☞문 앞에 새그물을 친다는 뜻으로, 권세를 잃거나 빈천(貧賤)해지면 문 앞 (밖)에 새그물을 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방문객의 발길이 끊어진다는 말.
[원] 門外可設雀羅
[반] 門前成市
[출전] 『史記』〈汲鄭列傳〉/ 백거이(白居易)의〈寓意詩〉
[내용] 전한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급암과 정당시(鄭當詩)라는 두 현신 (賢臣)이 있었다. 그들은 한때 각기 구경(九卿:9개 부처의 각 으뜸 벼슬)의 지위에까지 오른 적도 있었지만 둘 다 개성이 강한 탓에 좌천면직재등용을 되풀이하다가 급암은 회양 태수 (淮陽太守)를 끝으로 벼슬을 마쳤다. 이들이 각기 현직에 있을 때에는 방문객이 늘 문전성시 를 이루었으나 면직되자 방문객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고 한다.
이어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급정열전(汲鄭列傳)〉에서 이렇 게 덧붙여 쓰고 있다.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賓客)이 열 배 로 늘어나지만 세력이 없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경우는 더 말 할 나위도 없다.또 적공(翟公)의 경우는 이렇다.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자 빈객이 문 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붐볐다. 그러나 그가 면직되자 빈객은 금새 발길을 끊었다. 집 안팎이 어찌나 한산한지 '>문 앞(밖)에 새그물을 쳐 놓을 수 있을 정도[門外可設雀羅]'였다. 얼마 후 적공은 다시 정위가 되었다. 빈객들이 몰려들자 적공은 대문에 이렇게 써 붙였다.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곧 사귐의 정을 알고
[一死一生 卽知交情(일사일생 즉지교정)]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貧一富 卽知交態(일빈일부 즉지교태)]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은 나타나네
[一貴一賤 卽見交情(일귀일천 즉현교정)]
■ 물아일체 物我一體
[사물 물/나 아/한 일/몸 체]
☞외물(外物)과 자아,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울려 하나가 됨.
[유] 渾然一體
[예문] ▷ 적어도 아침 산책을 나섰을 때에만은 나는 생활에서 오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깡그리 벗어나서 차라리 한 그루의 나무요, 한 마리의 산새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기원은, 어느날 아침에 시냇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한 여인으로 해서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정비석의 ‘색지풍경’에서>
■ 물외한인 物外閑人
[만물 물/바깥 외/한가할 한/사람 인]
☞세상의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한가롭게 지내는 사람.
[유] 遊遊自適(유유자적)
[예문]
▷ 조선의 선비들에게 있어 소요는 물외한인(物外閑人)으로써 은일을 즐기며 지락에 이르는 한 방법으로써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도가적 사상이나 행위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을 뿐, 국시(國是)로는 한 번도 장려되거나 강조되지는 못하였다
▷ 사안이 기생이나 데리고 청담이나 해 가면서 세상을 잊은 듯 산수 간에 헤맬 때 그는 한 개 물외한인이지, 누가 뒷날에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해 내고 쓰러지려는 나라를 구원해 낼 큰 재상이 될 줄 알았겠소?≪박종화, 금삼의 피≫
[참고] 〈예장소요도〉는 소경인물산수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이 보통의 산수화와 다른 점이라면 화면 속의 인물이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배경의 자연 풍경과 적절한 비례치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볼 때는 일단 산수를 그린 풍경화로 인식되지만, 세부에 관심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물에 시선이 머물게 된다. 그러나 인물에 모아졌던 시선은 곧이어 다시 전체 풍경으로 옮아 가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산수 자연과 인물이 상호 교섭 관계에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주변의 나무나 산 등 경물들은 비교적 단순하게 묘사되어 있는 작은 규모의 그림이지만, 나머지 여백 대부분이 안개로 처리되어 있음으로 해서 유현(悠玄)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
그윽한 산수 풍경 속에 신선처럼 소요(逍遙)를 즐기고 있는 한 선비의 모습
이 무척 한가롭게 보인다.--<디지털 한국학>에서
■ 미망인 未亡人
[아닐 미/죽을 망/사람 인]
☞남편이 죽고 홀로 사는 여인.
[유] 一夫終身(일부종신) : 남편이 죽은 뒤에도 개가(改嫁)하지 않고 수절하며 일생을 마치다./ 出天烈女(출천열녀) : 하늘이 낸 열녀. 절개가 굳은 여인을 이른다./ 柏舟之操(백주지조) : 잣나무로 만든 배의 지조. 남편을 잃은 아내가 끝까지 정절을 지킴.
[출전] 『春秋左氏傳』莊公 28年條
[내용] 春秋시대 魯나라 성공(成公)이 재위 중 노의 백희(伯姬)가 송공(宋公)에게 출가하게 되자 계문자(季文子)라는 사람이 백희를 따라 송에 갔다. 계문자는 후행(後行)으로서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으므로 성공은 위로의 연회를 베풀었다. 그 연회석상에서 계문자는 詩經을 인용하여 성공과 송공을 칭송한 후, 송의 땅은 좋은 곳이니 출가한 희(姬)는 틀림없이 잘살 것이라고 노래하였다. 이를 듣고 있던 희의 모친 목강(穆姜)은 매우 기뻐하여 말하기를,“이번에 퍽이나 큰 신세를 끼쳤습니다. 당신은 선군(先君)때부터 충성을 다하였고, 이 미망인인 나에게까지 진력하여 주셔서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역시 시경의 녹의(綠衣)의 종장(終章)에 만족의 정을 의탁하여 노래를 부르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원문] 先君以是舞也 習戎備也. 今令尹不尋▒仇 而於未亡人之側 不亦異乎
[예문] ▷ 직업도 직업이려니와 애틋한 어린 미망인에 대한 같은 여자로서의 동정과 조상이리라.≪채만식, 탁류≫
▷ 사가의 법도와 범절이 무서워 상부(喪夫)한 미망인이 울지 못하듯 그녀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한무숙, 만남≫
■ 미봉책 彌縫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