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청사우(乍晴乍雨)
세상일이 참 뜻 같지 않다. 그때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기는 피곤하고, 무심한 체 넘기자니 가슴에 남는 것이 있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잠깐 갰다 금세 비 오고(乍晴乍雨)’에서 노래한다. “잠깐 갰다 비가 오고 비 오다간 다시 개니, 하늘 도리 이러한데 세상의 인정이랴. 칭찬하다 어느새 도로 나를 비방하고, 이름을 피한다며 외려 명예 구한다네. 꽃이 피고 지는 것이 봄과 무슨 상관이며, 구름 가고 오는 것을 산은 아니 다툰다네. 세상 모든 사람들아 모름지기 기억하라, 평생을 얻는대도 즐거움은 없다는 걸(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譽我便應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花開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 寄語世人須記認, 取歡無處得平生).”
세상 인심을 가늠하기 어렵기가 종잡을 수 없는 날씨보다 더하다. 나를 칭찬하던 사람들이 돌아서면 더 모질다. 거기에 취해 내로라하던 시간이 참담하다. 혼자 고상한 척을 다 하더니, 알고 보니 탐욕의 덩어리였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세상에 대한 환멸만 는다.
하지만 이런 것은 모두 내가 바라고 기대한 것이 있어서다. 꽃이 늦게 피거나 일찍 시든다고 봄이 안달을 하던가? 구름이 오고 가는 것에 산이 성을 내던가? 이래야만 하고 저래서는 안 되는 잣대를 자꾸 들이대니 삶이 피곤해진다. 날씨 따라 마음이 들쭉날쭉하고, 상황을 두고 기분이 널을 뛰면, 정작 큰일이 닥쳤을 때 감당이 안 된다. 이러면서 기쁘고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나 그런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색(李穡·1328~1396)의 ‘진관 스님이 와서 당시(唐詩)의 말뜻을 묻다(眞觀大選來問唐詩語義)’란 시는 이렇다. “진관 스님 찾아와서 당시를 묻는데, 비 오다가 개는 사이 산속 시간 옮겨갔네. 초당에 부는 바람 청신함 뼈에 저며, 조금 깊이 들어앉아 서재 장막 내린다네.(眞觀釋子問唐詩, 乍雨乍晴山日移. 風入草堂淸到骨, 差夫深坐下書帷.)” 바깥 날씨는 비 오다 갰다를 반복해도 두 사람의 대화는 조분조분 이어진다. 진진한 얘기를 이어가려고, 볕 나면 발을 걷고 바람을 쐬다가, 비 오면 발을 내려 깊이 들어앉는다. 아무 걸림이 없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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