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순후(務用淳厚)
1748년 7월 14일, 황경원(黃景源)과 임순(任珣), 이의경(李毅敬) 세 신하가 사도세자를 모시고 시강(侍講)을 막 마쳤을 때였다. 세자가 갑자기 물었다. “계방(桂坊)은 집이 어디요?” 이의경이 엎드려 대답했다. “강진(康津)입니다.” 세자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글 뜻을 그대가 잘 풀이해 일깨워주니 마음으로 깊이 훌륭하게 여기오. 감사의 표시요.” 한 폭의 종이를 꺼내 내시에게 전달하게 했다.
세자가 친필로 쓴 자신의 시였다. 시의 내용이 이랬다. “가장 즐거운 중에 책 읽기가 즐겁고, 천금이 귀하잖코 덕행이 귀하다네(最樂之中讀書樂, 千金不貴德行貴). 꿈에 좋은 신하 얻어 천하를 다스리니, 성(誠)과 경(敬)이 날개나 바퀴와 다름없네(夢得良弼治天下, 曰誠曰敬如翼輪). 등불 빛 휘황하게 자리 앞에 늘어섰고, 날마다 밤낮으로 어진 선비 접견하네(光燭煒煌坐前列, 日日晝夜接賢士). 동령에 해가 떠서 사해를 비추이니, 아침 기운 맑고 밝아 독서를 할만하다(日出東嶺照四海, 朝氣淸明可讀書).”
나머지 시는 이랬다. “기강이 바로 서야 상벌이 분명하고, 상벌이 분명해야 나라를 다스리리. 국가가 다스려져 백성이 편안하고, 크게 공정한지라 조금의 사(私)가 없다. 조금의 사(私)가 없어 천도를 깨달으니, 천도를 깨달아야 임금 덕에 합당하리(紀綱樹兮明賞罰, 賞罰明兮乃治國. 國家治兮百姓安, 大公正兮少无私. 少无私兮體天道, 體天道兮合君德).” 꼬리 따기 식으로 맞물려 세자의 포부를 적은 내용이었다.
바로 전날 필선(弼善) 황경원이 세자에게 친필 글씨를 청했을 때 세자는 대꾸도 않다가 그가 자꾸 조르자 마지못해 중관(中官)을 시켜 다른 시를 베껴 써주게 했었다. 그러고는 그 이튿날 보란 듯이 이의경에게 이 친필 시를 써주었다.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는 일종의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이의경이 친필로 남긴 ‘동궁께서 특별히 하사하신 보묵(寶墨)의 뒤에 쓰다(題東宮特賜寶墨後)’란 글에 전한다. 성(誠)과 경(敬)을 날개와 바퀴로 삼아, 좋은 신하를 얻어 기강을 세우고 상벌을 분명히 하며, 공정 무사의 정신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싶었던 사도세자의 묻힌 꿈을 떠올려 보게 하는 시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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