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스무나문 해가 바뀌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내 장난기어린 짓, 하지만 숙명적 저항의 짐, 그 부림 터였으니 아주 마땅한 몸짓이었다.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날을 위한 삶의 목표였고 기쁨의 원천이었기에 이제는 혼자 끄덕일 수 있는, 나만의 무형 자산으로 남아 있다.
나만의 꿈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가늠할 겨를은 없다. 다만 밭 한 가운데 엎드린 바위가 눈엣가시처럼 몹시 거슬리고 밉다. 이랑을 돋울 때 가로막는가하면 고랑을 지울 때도 그 큰 등 비늘로 쟁기에 불꽃을 일으키며 나를 한숨지우는, 애물로 다가온다.
그야 저는 저대로 그냥 거기 있기에 나더러 오라거나 옮겨달라거나 할 이유는 티끝만치도 없는, 그대로의 제 몫이고 제 자리라는, 거부의 당당함이지만 내게는 내 갈 길을 가로막는 저주의 걸림돌 바위다. 이 또한 바위의 말에 항변하는 나의 도전변이리라. 이렇듯 바윗돌은 턱짓으로만 나를 조롱할 뿐이다. 드러난 등짝만도 한 발이나 됨직하니 흙속에 묻힌 몸뚱이야 얼마나 클까? 어림되지 않으면서도 포기 할 수 없다. 이는 바위를 보는 내 나름의 눈이 있음에 위안을 얻기 때문이리라.
짐작컨대, 작은 개울가의 밭 한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바위는 골짝을 쓸어 메울만한 홍수에 떠밀려 굴러 내렸을 것이고, 세월과 더불어 물길이 바뀌면서 부드러운 흙과 자갈이 그 바위 둘레와 바닥을 메워 감싸 안았으리라고 생각하니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흙속에 묻혔으되 바위의 뿌리는 저 멀리 보이는 산 자락의 어미 바위에 남아 있으리라는 믿음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나를 도울 이는 아무도 없다. 말릴 사람은 더구나 없다. 외롭지만 혼자 해 볼 참이다. 결과를 그려본다. 어느새 어깨가 들썩인다. 내게는 오로지 시간과 의지에 따른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가진 모든 것, 바위보다 굳은 내 의지이니 이것만으로도 싸움의 승패는 내 쪽으로 기울 것이 틀림없다. 묻힌 이 바윗돌을 어떻게 하든지 끌어 올려서 밭둑으로 옮겨놓아야 하겠다는 욕심은 이토록 점점 굳어진다. 믿는다.
쓰일만한 연장이래야 이웃집에서 빌린 내 키 크기의 쇠 지렛대와 농막의 한 귀퉁이에 버텨서서 밭 지킴이 노릇이나 하는 괭이와 삽뿐이다.
뙤약볕 아래 줄지어가는 개미떼가 내게 힘을 보탤 것인가!? 아니면 여러 해를 견디어낸 애벌레의 끈질긴 한풀이 삶, 매미의 개가(凱歌)가 바윗돌을 타령으로 뇌는 내 노래의 추임새라도 될 것인가!? 아니면 골짝을 쓸어가며 솔향기 모아 토하는 대지의 숨결, 그 미풍이 나의 폐부를 확장하여 안도의 한숨이 될 것인가? 어림없지!! 그들 나름의 존재향기를 뿜을 뿐이다. 그 향기가 아지랑이 같은 내 어설픈 삶의 한 자락을 붙들고 함께 하리라는, 내 믿음에 보탬이 될 수 있음을 아는 내가 여기에 있기에 그들 또한 나와 함께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이 믿음만이 내 힘의 원친이다.
우선은 바위등짝의 몇 갑절이 될지라도 넓게 그 주위를 파 들어가고 볼 일이다. 며칠 동안은 쉬어가며 자개돌과 흙을 파내는 일이 거듭되었다. 끝내 바위의 배 바닥이 드러났지만 내 무릎은 바윗돌 허리에 닿고, 파낸 흙과 자갈더미는 내 어깨와 겨룬다. 깊이 박힌 이 바위를 어떻게 들어 올려서 옮길 것인가? 나는 그냥 주저앉고 만다.
흙더미 너머 보이는 먼 산허리에 매달린 흰 구름은 어느새 바위가 되어 옮아간다. 아니다. 구름은 제자리다. 산이 옮아간다. 상상의 나래는 머릿속을 홰친다. 그렇다. 될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밭 둑 이곳저곳에 있는 큰 돌이거나 작은 돌이거나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보듬거나 업어 날라다 파놓은 바위 주위에 던져 넣는다. 팔매도 한 몫을 한다. 아마도 누가 보면 실성한 사람이 미친 짓을 하는 것쯤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또한 아랑곳 하지 않는다.
내 풍모(風貌)는 더욱 가관이다. 삼복더위를 한 겨울차림으로 이길 셈이다. 긴 가죽구두, 긴 바지, 스타킹, 무릎과 정강이 보호 장구, 긴 팔의 윗도리에 조끼, 연장꿰미 요대(腰帶), 그리고 목도리, 머리위에는 수건, 또 그 위에 긴 둘레창이 달린 모자를 쓴 내 몰골은 내가 보아도 불난 곳의 소방관 형국(形局)이다. 온 몸에 밴 비짓땀은 육신의 관절에 윤활유라도 되듯 운신의 폭을 한결 부드럽게 넓힌다. 겉은 소나기를 맞은 듯 흐르지만 속은 매미 울음과 어울려 청량(淸凉)할 뿐이다. 이 모두 의지의 소산이리라.
이렇게 해서 바위 둘레가 반 쯤 메워졌을 때 지렛대를 바위와 작은 돌 사이에 되도록 짧게 걸쳐 넣고 손잡이는 되토록 끄트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밑으로 힘껏 눌렀다. 불꽃을 튀기고 돌가루먼지를 일으키더니 그 틈새로 작은 돌들이 굴러 들어간다. 옳다. 이것이다. 희망은 실현되고 있다. 시간은 얼마든지 내게 주어진다.
그늘을 찾아가서 청솔모와 다람쥐와 새들과 함께 시도 때도 모르는 새참으로 내 흥분을 가라앉힌다.
이제 대칭점인 반대편에서, 또 둘레를 돌아가며, 끈질기게 괴고 누른다. 한 치씩 벌어진 틈새에 흙과 작은 돌들이 굴러들어가면서 바위는 그만큼씩 떠오른다. 바위가 위로 올라올수록 굴러드는 자갈이나 흙이 움직이지 않으니 이번에는 내 발이 흙과 돌을 밀어 넣는, 그 몫을 해내야한다. 되도록 내 힘이 적게 쓰이도록 작은 돌을 지렛대에 바치고 조금씩 올리고 그 사이에 돌을 발로 밀어 넣는, 지극히 위험하고 조심스런 일을 해낸다.
이렇게 며칠 동안 돌로 괴고 지렛대로 젖히고 누르기를 반복한 끝을 보게 된다. 바위는 이제 밭이랑 위로 온전히 드러났지만 이 바위를 밭 가장자리로 옮겨가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대로 놓아두면 애초의 바위보다 더 큰 덩치로 위압(威壓)할테니 어떻게 하든 밖으로 옮겨놓아야 하련만 도무지 방도를 찾을 수 없다. 또 며칠이 지났다.
밭 둘레에 쓸모없이 자라면서 그늘지운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다가 두 줄로 ‘나무레일’을 놓고 그 위에 짧은 통나무도막을 여러 개 가로질러 놓고는 바위 곁의 흙을 걷어내니 바위는 평면보다 조금 위에 놓여있다. 이제는 지레를 걸어 바위를 나무도막 위로 얹어놓고 조금씩 밀어내고 뒤로 물러나은 나무도막을 바위 앞부분의 나무레일위에 옮겨놓고 또 바위를 움직이기를 수 없이 반복한다. 드디어 밭 가장자리에 옮겨진다.
흙과 자갈이 바위자리에 바꿔 채워졌으니 이번에는 흙을 흩어 고르는 일로 마무리 지어진다. 겨우 바위 등짝만큼의 땅을 얻은 꼴이지만 기쁨은 하늘에 닿는다. 그 기쁨은 온몸을 감싼다.
어느새 산그늘은 골짝을 암녹색으로 물들인다.
무리저서 얽힌 산딸기 밭이 돼버린 여기에 호두나무를 심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바위가 엎드렸던 자리에서는 먹을 것이든 볼 것이든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 한 해였다.
어느 누가 알랴. 무엇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일하도록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지만 여기 내가 있고 여기 밭이 있고 하늘이 있고 개울 물소리와 산새소리와 매미의 교향(交響)이 나를 추겨서 이렇게 움직이도록 하는지도 모른다. 보다나은 것,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해야 하는 것, 기름진 땅으로 만들어야 비로소 그곳에 발을 딛는 몫을 하는 것으로 알아 지렛대로 연주하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아무도 시비하지 않으니 나만의 추억이고 독백(獨白)이다. 그 곳의 용도가 다르게 매김 되었다면 그 바위는, 어쩌면 옮기지 않았어야 제 몫을, 제 위상을, 즉 존재의 이유가 되는 자리로 될 것인지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 내 몸짓은 내가 원래(原來)의 범주(範疇)를 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원초(原初)적 의지의 소산이 아니었나 생각하면서 빙긋이 웃어 본다. 다 지난 내 삶의 흔적들이다.
8131.080813 /외통徐商閏印